예년에 비해 시월 하순임에도 불구하고 올해는 가을이 그리 빨리 오지 않았다는 느낌이다. 단풍도 구경하기 전에 생뚱맞게 눈이라도 내렸으면 좋겠다는 성급한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 떠나가는 모든 것에는 눈물겨움이 있다. 그 무덥던 지난여름이 떠나간 것에도 아리고 사연 있는 아픔이 배여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조직과 사람과의 관계에도 묘한 아픔이 여기저기 공존하며 서로를 보듬고 산다. 조직 내에서 매일매일 부딪혀야 하는 가까운 지인들과의 크고 작은 인연에도 어쩔 수 없는 관계의 힘이 작용한다. 떠나는 것에 아픔을 느끼지 않는 것은 이
정치의 계절은 가을도 없이 겨울부터 오는가 싶었다. 강서구청장 선거 이후 어수선한 계절에 나라 밖 세계정세는 전쟁의 공포에 다시 휩쓸리고 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이어 이번에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분쟁으로 사상자 수는 날마다 늘어나고 있다. 국내 정치는 언제나 그랬듯 이리저리 흔들리며 갈팡질팡이고, 민생은 낮은음자리에 맴돌다 헛기침만 하는 계절이다. 민생은 구호로만 외치는 단어로 탈바꿈한지 오래, 늘 그 자리에서 제자리걸음만 하는 정치를 지켜보는 국민의 한숨은 가을바람이 불어도 사라질 기미가 없다. 그래도 희망은 있어야 하고,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허영을 뒤집어쓰고 사는 것일까? 아무리 진지하고 진실된 모습일지라도 세상 밖으로 드러내어서는 안되는 두려움이란 것이 있기 때문일까? 부와 명예, 권력 따위 필요 없다고 했지만 그 어떤 이유로, 어떤 근거로 자신을 포장하고 꾸미며 사는 것일까에 대한 의문에는 필자 스스로도 아직 답을 얻지 못했다. 빛을 보겠다는 핑계로 그림자 밑으로 숨어들어 자신을 방어하고 제 식구 감싸기에만 혈안인 이 나라 일부 정치인들의 치졸한 모습에서 국민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에 대한 생각도 해본다. 오늘도 허무와 허영의 나라에서 우리
오늘 문득, 새벽잠에서 깨어 아직도 여유로운 달빛을 봤다. 덥다 덥다 해도 지난여름만큼 더운 해가 몇 번이나 있었을까? 간절했던 시간은 흘러 어느덧 가을바람이 혈관을 타고 돈다. 계절의 순환은 언제나 대자연의 섭리였지 미천한 인간의 몫은 아니었다. 불볕이었지만 참고 견디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세월은 가을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새로움을 흩어놓고 있다. 추분 지나고 추석 연휴도 지났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낙엽 지는 단풍의 계절이다. 항저우 아시안게임의 승전보를 들어야 하는데 뉴스는 늘 어둡고 쾌쾌한 냄새 진동하는 양당정치의 볼썽사
계절이 스쳐지나는 하늘에도 가을이 물들어 있음을 느낀다. 각박하게 살아오며 좀처럼 보지 못했던 뭇별들이 오랜만에 찾아가는 고향마을에서 안부를 묻어올 것 같은 오늘이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 있듯 필자에게도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는 고향이 있다. 지금은 어머니 홀로 지키고 계시는 작고 외로운 산골 마을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고향에만 들어서면 알 수 없는 그 무엇이 여전히 숨죽이게 하고 있음을 실감한다. 고향이라는 편안함과 어른들이 계신 곳이라는 무게감에 안정감과 반듯한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교차하는 동네라서 그
떨어지는 낙엽은 가을바람을 원망하지 않는다. 가을날 자신을 비우고 희생할 줄 아는 잎이 있기에 봄날 새싹이 파릇파릇 움틀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비우고 버릴 줄 알아야 새로움이 채워지는 현상을 사람들은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 전국 대학뿐만 아니라, 지역사회 전체적으로 글로컬 대학 사업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다. 각 대학들은 저마다의 기준으로 선제적 통폐합 작업에 가닥을 잡아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들 본인이 소속된 대학은 문제없을 것으로 생각하는지 쉽게 내려놓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어 지켜보는 입장에선
또 한 계절을 보내고 단정한 마음으로 조상님을 만나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 지엄하신 누군가의 결론에 따라 예상치 못했던 고통이 이웃과 주변의 아픔으로 이어지고, 대형 유통업보다는 소상공인의 아픔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다가와 있는 시절이다. 그 아픔은 알고 느끼는 사람만이 치유 가능하다면 고통을 유발한 그 누군가에게는 어떤 책임을 물어야 할까? 풀어진 넥타이처럼 이리저리 헝클어진 국가와 국가 간의 문제로 무엇이 과학이고 무엇이 문제인지조차 정확히 설명 듣지 못한 현실에서 불편을 겪어야 하는 사람은 늘 국민의 몫이다. 역사의 어느 길
창원특례시가 지난 4월 ‘2030 창원도시관리계획 재정비’ 수립으로 도시의 사회적·경제적인 여건 변화에 따른 불합리한 도시계획 내용을 조정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도시 발전 방향 및 도시의 미래상을 구체화하고, 합리적이지 못한 도시계획시설, 용도지역·지구 등 도시관리계획에 대한 정비를 하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도시관리계획 재정비는 ‘국토의 계획 및 이용에 관한 법률’에 따라 도시기본계획에서 제시된 장기적인 발전 방향을 구체화하고 실현시키는 중기계획으로, 5년마다 도시의 여건 등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해서 반영하는 법정계획이다. 1차적으
어떻게 살아내는 것이 잘 살아내는 것인지에 대한 답을 아직 얻지 못했다. 후보 매수 혐의로 기소된 홍남표 창원시장의 재판 진행을 두고 생각이 많아지는 계절이다. 우리가 아는 일반적 공직선거법 선고 기한인 6개월을 지나도 한참 지났다. 법의 기준이, 그것도 재판 일정이 이렇게 흘러가도 되나 싶을 만큼 선고 일정은 예상하기 힘들어졌다. 현행 선거법상 ‘1심 선고는 공소 제기일로부터 6개월 이내 이뤄져야 한다’라는 일반적 내용으로 알고 있지만 이 또한 사실상 훈시 규정이라 법적 구속력이 없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해 11월 2
인구 소멸, 국가 소멸 위기를 걱정할 정도로 우리나라 저출산 상황이 심각해졌다. 이에 대한 막중한 책임감과 사명감은 누구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우리 국민 전체의 문제와 책임으로 받아들여야 할 시점이 된 것 같다. 우리 정치는 늘 무슨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책만 분주히 찾는다. 그러고는 또 상대 당을 비판하고 결론에 가서는 서로를 향해 무책임하다고 책임을 전가한다. 필자가 아는 지인 중에 쑥뜸으로 환자를 치료하려고 하는 한의사가 있다. 화학 약품에 의존하지 않고 몸의 복원력을 이용한 쑥뜸을 통한 마음의 소통, 해
별생각 없이 ‘생각’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하고 살았다. 생각으로 인한 실행은 상대의 의사와 무관하게 스스로가 내린 결론에 따라 상대에게는 예상치 못한 아픔을 자극하기도 한다. 생각이라는 단어는 흔히 쓰는 말이지만 주어지는 결론의 차이는 다양하다. 비슷한 말로 사고와 사색, 사유는 어떻게 다른지도 생각해 봤다. 사고는 ‘머리와 가슴으로 생각한다’는 말이고, 사색은 ‘얽힌 실타래에서 더듬어 찾는다’는 뜻이며, 사유는 ‘마음에 묻는다’는 뜻의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슷하지만 약간의 의미는 다르게 그 쓰임새가 있어 보인다. 생각은
하늘을 올려다봤다. 까만 어둠 사이로 죄인에게 가하는 징벌의 법 조항이 별빛처럼 나열돼 죄목을 하나하나 열거해가며 죄를 묻는다. 오늘은 그리 길지도 않았던 밤이 불면으로 새벽까지 빨리 맞았다. 살아내는 일은 죄를 만들어가는 행위와 더불어 나로 인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아픔도 키워가는 일이 아닌가 싶은 생각으로 반성이라는 글자를 하늘일 것 같은 까만 공간에 써봤다. 뜨거워야 할 여름밤이 오히려 차갑게 느껴지는 것에는 인간의 부족함이 만들어내는 부족한 인격의 결과에 대한 당연함으로 스스로 추해지는 자신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싶은 생
팔월 한더위에 빨갛고 실한 고추가 매운 향을 풍기며 달려있다. 긴 장마 이겨내며 깊고 어두운 땅속에서 뙤약볕을 견뎌온 뿌리 덕분이겠지 싶은 마음에 무성한 잎과 그 열매들이 신통하게 여겨지는 계절이다. 모든 생명체의 근원이 뿌리라면 사람의 뿌리는 아버지의 뿌리로부터 먼 조상의 뿌리로 이어져 내려오는 귀하고 귀한 존재의 뿌리에서 시작돼 다시 자손이라는 가지를 뻗어나가게 하는 신통함을 지녔다. 그런 귀한 존재들이 우리 스스로의 그릇된 생각으로 환경을 지배하려다 오히려 환경에 지배당하는 현상을 보며 인간의 잘못을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은 오
어둑한 그림자 사이로 배시시 웃어주던 하얀 찔레의 순수한 모습이 어린 시절을 지나온 꿈같은 시간을 뚫고 우리를 따라 걸어온다. 오늘 밤엔 장맛비가 또 거세게 내리지는 않겠지? 오랜 장맛비에 수해 입은 지역도 늘어나고 인명 피해까지 생겨 아픔이 많은 계절이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우리 경남지역은 도지사를 비롯한 관계공무원들의 적극 예방활동 덕분으로 대형 사고 없이 잘 지나가는 것 같은 느낌이라 사고는 수습이 아니라 예방이라는 교훈을 다시 한번 더 배우게 된다. 이와중에 창원시는 계속된 악재로 특례시의 위상은커녕 지난 선거 이후 끊임없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한 잔의 술과 버지니아울프의 생을 논하던 밤이 70여 년 전 박인환 시인에게만 필요했을까? 누군가에게는 윤동주나 모윤숙이 더 필요했던 밤도 있었을 것이고, 지금의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인문학이 아닌가도 싶다. 80년대 초 부산에서 대학생활을 하며 일꾼도서원이라는 책방 회원으로 가입해 이념 서적을 읽으며 밤을 새운 때가 있었다. 사람들은 가끔 대상이 누군지에 상관없이 뜨거운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와 터놓고 이야기해 보고 싶은 사
개구리 소리가 그립고 반딧불이가 그립기도 한 도심의 밤이 장맛비에 지쳐있다. 볼륨 낮은 티브이 뉴스에 귀 기울여보는 시간, 창을 두드리는 요란한 빗소리가 가슴 먹먹한 보도를 예고하는 듯해 어두운 밤하늘을 멍하니 바라봤다. 별빛 없는 하늘 아래 홀로 밤길 밝히는 가로등이 비를 맞고 섰다. 사람이 바뀌고 그리 오랜 시간이 아님에도 계속되는 잡음은 요란한 빗소리에도 잦아들지 않는다. 본연의 업무보다는 일신상 정리해야 할 일들이 우선이라 그런 걸까? 믿어야 할 측근들마저 잡음에 휩싸이는 모습은 시민의 눈에는 측은하기만 하다. 언제부터 창원
살만해졌다는 오늘이 정말로 살만한 시절이라 그리 말하는 걸까? 세세히 직접 말로 다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현실을 바라보는 정확한 비평에 가까운 글을 쓰는 것이 기자의 책무라 생각한다. 날마다 새롭게 얼굴 내미는 기사는 언제나 세상 역사와 함께 살고 죽었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를 두고 당사국 일본을 제외한 아·태 10개국 80%가 해양 방류는 “무책임하다”는 설문 응답 결과에 답한 것은 우리 국민의 생각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이 시점에서 우리 정부가 주장하는 안전에는 과연 문제가 없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남는
차별에 상처받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유월에 내리는 비가 소나기처럼 가슴으로 와닿는 날, 우산 하나 받쳐 들고 비 오는 용지호수를 걸으며 우리 지역 공직사회가 지방 언론마저 차별하고 외면하는 심각성에 대한 이유를 알고 싶었다. 지방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지방 문화의 창달과 수도권에 집중돼 있는 언론 문화와의 격차 해소, 그리고 지역에서 느끼는 문화 소외감을 대변하고 지역민을 위한 빠른 정보와 언론 대변자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하지만 언제부터 형성됐는지 알 수 없는 카르텔에 막혀 일부 신문을 제외한 지방지의 접근이
바람이 흔드는 밤꽃향이 비좁은 산골을 꽉꽉 채워가던 유년 시절의 그 유월이다. 퇴직하신 아버지는 고향마을 야트막한 야산에 밤나무를 심으셨고 밤꽃향도 몇 해 맡지 못하시고 황망하게 떠나셨다. 지난겨울 아버지가 심어놓은 밤나무를 작은형은 인부를 사서 몇 그루만 남겨두고 아버지의 업적을 치부책에서 지우듯 톱질해버렸다. 간신히 살아남은 몇 그루는 삼십여 년이나 지난 고목이지만 잘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인지 아직은 건재하다는 시위인지 뿜어내는 밤꽃향 만큼은 여전히 스무 살의 청춘이다. 유월 진한 밤꽃향을 따라 젊은 날의 아버지가 걸어 나오시는
고독한 사람을 고독하지 않게, 슬픔에 잠긴 사람을 슬프지 않게, 절망에 허우적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절망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그런 힘과 용기와 능력이 있다면 그 힘과 용기가 수반된 능력은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는 것일까? 꽃의 이름을 가진 그들 사이에도 덜 슬프고, 덜 외롭고, 덜 괴로운 꽃들이 따로 있을까? 주변에 널린 수많은 꽃들로 인해 계절은 분명 아름다움의 절정이고 그 무수한 꽃을 찾아드는 벌나비의 활동적 생동감이 나태한 인간에게 던지는 메시지도 강렬하다는 느낌이 든다. 좋은 자리에 터 잡은 꽃자리에 찾아드는 벌나비의 수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