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터’ 관리 창원시 지원 절실기초단체로는 시가 처음 도입경남대리운전노조 간부 11명돌아가며 ‘쉼터’ 관리 ‘멱장기수’는 한 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장기수를 말하는데 자칫 창원시가 이에 해당되는 논란에 휩싸일 것 같다. 안상수 창원시장은 지난해 11월, 추위와 더위에 노출된 창원지역 3000여 명 대리기사들을 위해 비바람을 피할 쉼터를 마련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그리고 6500만원 시비를 들여 4개월 만인 지난 3월 8일 유흥가가 밀집 된 상남동 인근 한 공용주차장 한 켠에 50㎡ 규모 이주노동자 ‘쉼터’를 조성하고 개소식을 가졌
같은 시기 같은 내용 동시 진행 요즈음 여름을 목전에 둔 거창은 시끌벅적하다. 지난 29년간 거창 수승대에서 30여 개국 연극인들이 참가하는 ‘거창국제연극제’를 두고 밥그릇 빼앗는 소리가 요란하기 때문이다. ‘거창국제연극제’는 분명 (사)거창국제연극제육성진흥회라는 민간단체가 지난 1989년 ‘시월 연극제’ 타이틀로 시작된 행사인 것은 350만 경남도민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 민간단체가 거창에서 2시간 이상을 달려와 경남도의회 브리핑룸에서 억울함과 분통을 호소하면서 기자회견을 벌인 이유가 무엇인가? 이들 말에
“행적보다 침몰직전·후 3시간에 무게 둬야 마땅”“일반인 희생자 54명도어엿한 우리 국민이다” 지난 2014년 4월 16일 오전 침몰된 ‘세월호’는 그동안 정치적으로도 이용됐고 국민들 간 숱한 억측도 난무했었다. 그 ‘세월호’가 3년이 채 안된 지난 3월 23일 오전 3시 45분 1073일 만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인양된 ‘세월호’를 바라보는 모든 국민들의 시각은 제각기 다르겠지만 304명이 숨져간 사실에는 모두 가슴이 메어지는 감정일 것이다. 특히 갓 피어난 꽃봉우리 단원고생 243명이 운명을 달리한 사실은 우리에게 커다란 슬픔
1934년 스탈린을 인민을 팔아 노예로 만드는 산적(山賊)이라고 공공연하게 비난하며 스탈린의 애찬론자로 보수파의 지식인이었던 톨스토이의 뺨을 후려갈긴 후 악명 높은 사상경찰 ‘게페우’에 끌려가 정확한 생몰연대조차 오리무중인 당시 소비에트 최고의 지식인으로 존경받던 진보파의 지식인 ‘만델리슈텀’이 살았던 비참한 시대상과 대한민국의 2016년은 너무나 닮은꼴이다. 얼마 전 창원시 진해구 안민터널 앞 고층 건물에 이런 긴 현수막이 내걸렸었다. ‘신 창원 팔각회’라는 단체에서 내건 것으로 ‘사드를 반대하면 종북(從北)주의자’라는 이념성이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긴다’라는 말은 살아생전의 족적을 표현한 말이다. 특히 과거 선비라 칭하는 유학자들은 이름을 지키기 위해 모든 명운을 걸었다. 인간의 타인을 향한 분노나 살의는 거의 조상이나 자신의 이름을 상대가 무시한 데 따른 물리적 표현이자 행동이었다. 이름은 가장 신성한 인격체이자 자신의 모든 자존심이 걸린 무형의 생명체다. 유학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이름이 바로 신앙이나 다를 게 없었다. 부조(父祖)의 함자에 대한 외경은 피휘(避諱)라는 풍습을 낳았다. 피란 피한다는 뜻이고 휘란 살아계시거
오는 14일은 부처님께서 룸비니 동산 무우수(無優樹)나무 밑에서 2560년 전 탄생한신 날이다. 무우수란 ‘근심과 걱정이 없다’라는 뜻이다. 인간에게 세상과 세월이 어떻게 변하던 살아 있는 물체와 생명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을 피할 수 없고 생노병사(生老病死)를 면할 수 없다. 인간의 육신은 우주의 일부분이므로 태어나고 죽는 과정 그 자체가 기쁨과 괴로움이 아니라 진화하는 과정에 불과한 것이다. 어느 종교나 마찬가지겠지만 종교의 근본은 선(善)이다. 가지는 것과 주는 것 즉, 회향(回向)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생명체의 근성도 달
5월은 근로자의 날, 어린이 날, 어버이 날, 스승의 날, 부처님 오신 날인 석탄절(釋誕節)이 들어 있어 어느 달보다 가족 친지, 이웃들과 더불어 할 수 있는 연중 최고로 많은 달이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 같아서 행복한 사람들이 있는 반면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5·18민주화운동이 들어 있는 달이기도 해서 아직도 그 아픔을 씻지 못하고 슬픔과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희생자들의 유족들이 생존해 있다는 걸 잊으면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의 이란 방문으로 수십조 원의 수출길이 열리고 미끄러진 경제가 다시 소생할 수
국민들의 가슴에 세월호는 우리 사회가 지닌 낙인(烙印)같은 자화상의 일부에 불과하다. 세월호 문제의 슬픔과 고통의 단초를 거슬러 올라가면 해양경찰에게만 늑장대응이라는 면류관을 씌워 험한 공직자들로 비하시킨 언론과 미디어 매체에도 그 책임이 없다고 볼 수 없다. 항상 입만 열면 비판과 저격으로 생존하는 우리들에게도 이념과 지역색을 부추기고 강자와 빈자를 역 차별하는 앵벌이 저널과 논객들이 기생충보다 더 득실거린다는 국민들의 비판과 비난을 타산지석으로 삼지 않으면 안된다. 세월호 사건 초기에 현장과 유족들을 품에 안은 대통령의 눈물은
FTA협정국이 늘어나며 특정 생산품은 호재를 구가하고 있는 반면에 가장 중요한 우리의 자원과 특히 국민의 주식인 식량안보는 위기에 처해졌다. 정부에서는 이런 점을 간과해 농민들에게는 쌀이 아닌 건강식품으로 분류되는 잡곡과 하우스 작물을 권장하고 수산과 축산종사자들에게는 우량종을 개발해 소득증대를 꾀하고 있지만 연중행사로 덮치는 적조와 구제역 그리고 작물을 고사시키는 바이러스 균들에 대해 선진국에 비해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14년 전인 2002년 경북 예천 농촌지도소에서는 특별한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실행에 옮
언론이 살아 있다는 것은 민주주의도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논리와 정비례한다. 지구촌의 100여 개가 넘는 국가에는 모두 나름대로 언론이라는 게 있기는 있지만 언로를 완벽하게 보장하는 나라는 드물다. 흐르는 물을 유수(流水)라고 한다면 언로는 유언(流言)으로 말의 흐름이다. 물이 고이면 썩듯 언론도 좌나 우로 고착되면 썩는다. TV와 신문에 난 보도를 유언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미디어매체에 보도되는 그 유언을 거의 진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언론이 활자로 찍혀 거리에 뿌려지면 그건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하나의 생명체가 된다. ‘3·1
1960년대인가? ‘이정표 없는 거리’ 라는 트롯 가수 김상진 씨의 노래가 갈지 자(之)처럼 바로 걷지 못하는 난마도 같은 당시의 사회분위기에 편승해 공전의 히트를 쳤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제로서 모든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국민에게서 나온다. 그런데 작금의 현실에서 국민은 실종되고 정치권만 존재하는 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3권 분립이 헌법에 명시된 자동성(自動性)의 원리에 기초하는 민주주의는 권력도 분업적(分業的) 협동체의 기능으로 행사 되는
그동안 입법부의 일원으로 그 누구보다 성실한 낮은 자세로 묵묵하게 소임을 다해왔던 새누리당의 안홍준 마산 회원구 국회의원이 공천에서 탈락해 그의 덕목과 성실성을 아는 주변 지인들과 당원 그리고 회원구민들에게 많은 아쉬움을 주고 있다고 전해진다. 물론 공천된 윤한홍 후보는 홍준표 지사의 측근으로 행정부지사를 역임하면서 도정에 지렛대 역할을 해온 분이기에 당선된다면 국정과 도정, 회원구에 큰 일꾼으로 역할을 수행하리라는 건 잘 알고 있다. 다만 주변 여론은 안 의원의 공천 탈락이 새누리당의 당리당략과 계파간의 갈등과 내분을 봉합하기 위
필자는 요즈음 자주 산에 오른다. 산은 정복당하는 게 아니라 항상 제자리 있다. 산을 정복한다고 하는 것은 산에 대한 모욕이다. 또한 산은 선악의 개념 없이 누구나 공평하게 반겨주기 때문에 그 곳에서도 무형의 진리를 배운다. 산이 주는 매력은 인간의 고귀한 주권과 닮아 있다. 인간은 강한 자에게 속박당할 순 있어도 정복당하진 않는다. 그게 민주주의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이다. 2015년과 2016년을 살아가고 마주하는 국민들은 어느 때보다 민주주의의 돌연변이와 권력, 즉 사회전반에 기생하는 금수저들의 갑질과 또한 정치적 진실과 도덕적
지금은 고인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에 의해 강제 납치된 사건이 지난 1973년 8월쯤으로 기억되는데 당시 이 사건에 대해 일본조야는 전쟁불사라도 할 것처럼 성명서를 연일 발표했고 일본의 모든 언론들은 자국 내에서 벌어진 한국 공안기관의 행위를 주권침해라며 한 목소리로 한국을 규탄하는데 앞장섰다. 아직까지 이 문제에 대한 진실규명에 입을 다물고 있는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박정희 대통령의 친서를 다나가(田中角榮) 수상에게 전달하자 투견처럼 날뛰던 일본은 언제 그랬냐는 식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주권침해라면 지난 1895년
인간은 하루 한시 한 날도 시험대에 오르지 않은 시간과 날이 없다. 태어나면서 죽음에 이르기까지가 모두 시험의 연속이다. 성경의 야보고서 1장 14~15절에는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해 죄를 낳고 죄가 성장한 즉 죽음을 낳느니라’라는 구절이 있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실천한 것은 부유하고 권력을 쥔 자들을 위한 설교가 아니라 핍박받고 소외된 자들에게 희망을 대신 전해주는 메시지였다. 생선 몇 마리로 기적을 베풀어 수천 명을 먹였다는 것은 그 시절의 시대상황을
최근 창원시 한 중학교 1학년 13살 어린학생 6명이 집단폭행이라는 이유로 학교폭력법 제17조 1항 4호에 의거, 사회봉사명령 2~3일 처분을 받았다. 절친한 친구 7명 중 한명을 집단폭행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두고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세상이 참 많이 변했구나, 아니 사람들이 너무 많이 변했다. 물론,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현실에서 옛날이야기를 끄집어낸다는 것은 구태적 이야긴지 모르겠다. 예전에는 친구들끼리 싸우다 코피가 터지면 코피를 흘리는 친구가 진 것으로 간주됐다. 이긴 친구는 오히려 미안해하며 그 친구에게 진정
새정치연합 소속으로 산업통상위원장인 노영민 의원이 여의도국회의원 사무실에서 자신의 시집을 카드단말기까지 설치해 놓고 판매하는 기막힌 상술에 국회가 개인서적을 파는 서점이나 마트로 전락해버렸다. 국민의 세금으로 세비를 받고 국민의 힘으로 온갖 특혜를 받고도 모자라 이제 서적 판매원으로까지 나설 만큼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지녀야 할 국민의 봉사자라는 마지막 희망을 노 의원은 팽개친 것이다. 그의 뒤늦은 사과와 보직사퇴도 이유 같지 않은 이유라는 게 분노한 국민들의 여론이다. 얼마 전 영면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부친이 멸치어장을 해 김영삼
평생을 국가와 민족과 민주주의를 위해 살다 가신 큰 별 하나가 떨어졌다. 1927년에 태어나 22일에 별세했으니 미수(米壽 88)의 나이로 김영삼 전 대통령이 타계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 김종필 전 국무총리인 3김을 빼고는 정치를 논하지 못할 정도로 그분은 3김의 정점에 계셨던 가장 큰 별이었다. 비록 국가경영에는 제 역량을 발휘하지 못했다고는 하나 국가원수라고 국정에 모두 통달할 수는 없다. 그러나 고인이 치욕을 감수하고 3당 합당을 통해 대통령에 당선돼 청와대에 입성한 날이 대한민국 민주
언론은 무형의 재판관이다. 그러므로 옳고 그른 사회 정의에 대한 판결을 정확하게 내려야 한다. 언론이 3%의 진실 뿐이라는 오명을 쓰고 불명예스럽게 추락한 요즈음에도 국민들이 염원하는 언론에 대한 기대는 언제나 소외된 자들과 박해받는 자들의 인권에 대한 방패와 지원군 역할이다. 사회 병리와 사회의 윤리는 사법부가 지키는 게 아니라 언론에게 주어진 고유사명이다. 권력이나 황금을 쥔 자들에 대한 놀랍도록 너그러운 판결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일란성 쌍둥이처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런 부당한 최종심에 대항해 그 저질스러운 판결을 뒤 엎고
진주유등축제 유료화 전환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후문에 힘입은 안상수 창원시장이 ‘진해군항제’, ‘가고파국화축제’, ‘K-POP 페스티벌’ 등 창원을 대표하는 축제에 유료화 전환을 조심스레 추진하고 있다. 과연 이 방안이 지역민은 물론, 진주유등축제를 다녀갔던 외지인들과 공감대를 형성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안 시장의 이 같은 구상은 정부가 ‘축제 경비를 내실 없이 탕진하는 지자체와 알뜰 축제를 운영한 지자체 간 지방교부금에 차별화를 둔다’는 발표에 위압감을 느낀 나머지 진주유등축제 유료화 성공이란 결과에 착안, 정부 방침에 부응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