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영화 ‘26년’과 나의 26년 전

  • 입력 2012.12.11 00:00
  • 기자명 이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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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영화 ‘26년’을 보았다. 대충 줄거리는 미리 알고 보러 간 영화였지만 영화가 상영되는 내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가슴 먹먹함에 영화시간에 맞춰 조금 일찍 먹은 저녁이 계속 명치를 찔러대 소화가 안 될 지경이었다.

보는 사람들마다 저마다 다른 느낌과 감정으로 영화를 감상하겠지만, 영화 ‘26년’은 나를 지금으로부터 약 26년 전의 20대 초반 군대시절로 돌려놓고 있었다. 그 시절 나는 경기도 포천의 백의리에 위치한 706특공연대에서 군 생활을 막 시작하고 있었다.
특공연대는 80년대 초에 당시 북한의 경보병여단, 저격여단, 정찰여단에 대항하기 위해 우리나라 육군의 각 군단 별로 하나씩 만들어진 특수부대이다. 기본적인 훈련내용과 유사시 임무는 특전사와 비슷하며 차이라면 특전사가 하사관 위주인 것과 달리 주로 일반사병으로 팀이 구성된다는 정도였다.

약 26년 전 1987년 5월 즈음, 갑자기 다른 모든 훈련이 중지되고 부대원들은 전투경찰이나 훈련해야 할 법한 데모진압훈련 소위 충정훈련을 매일같이 받게 되었다. 휴가, 외출, 외박은 제한되고 뭔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남도청 시민군 유혈진압 작전에 큰 공을 세워 무공훈장을 받고 승진을 거듭한 끝에 우리 706 특공연대장으로 부임한 연대장의 훈시가 있었다. “지금 서울시내와 전국 곳곳에 빨갱이들이 대통령선거 직선제를 주장하며 나라를 어지럽히고 있다. 우리는 국군 통수권자의 부름이 있으면 즉시 출동하여 이들 빨갱이들을 소탕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1987년 6월, 이때부터는 완전한 출동대기 상태였다. 원래 우리부대는 게릴라 부대라서 연대 내에 차량이 몇 대 없었는데 어디선가 차출되어 온 60트럭 수십 대가 연병장에 줄지어 선채 언제라도 출동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사태는 점점 급박해졌다. 밖에서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요구가 거세졌고 6·10 시민항쟁이 시작되었다.
안에서 우리는 군화를 신은 채 잠을 잤고 항상 단독군장에 착검을 하고 대기했다. 곧 출동이라고 한다. 우리부대가 진주할 곳은 마산, 그 중에서도 우리 팀은 마산여고에 진지를 구축하기로 계획되었다. 부마항쟁과 삼청교육대를 거친 인사장교와 소대장은 우리들에게 마지막 정신교육을 시켰다. “폭도들과 마주쳤을 때 네가 죽기 싫다면, 먼저 쏴라.”

며칠 후 소위 6·29선언으로 비상은 갑자기 해제되었다. 연병장에 줄지어 있던 트럭들은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버렸고 모든 충정훈련 관련 진압 장비들과 문서들은 소각되었다. 마치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모든 흔적들은 지워졌다. 충정훈련이나 비상출동, 계엄이라는 단어는 영원히 금기어가 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 때 진압군으로 투입되었던 공수부대원들처럼 1987년 6월 마산에 투입된 계엄군이 될 수도 있었던 나의 26년 전은 그렇게 흘러갔다.

그리고 2012년 현재, 자신들에게 도전하면 다 폭도나 빨갱이라고 누명 씌우던, 얼마든지 제2의 광주민주화 운동 유혈 진압도 재현할 수 있다던 그들, 명령이니까 그리고 죽기 싫으면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라도 총으로 쏘라던, 군대생활 편하게 하고 싶으면 노태우 찍으라고 협박하던 그들은 여전히 잘 살고 있다. 현실은 항상 정의가 승리하는 동화책의 결말과 너무나 달랐다. 가슴이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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