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열아홉 살의 지뢰밭 ⑪

  • 입력 2006.04.19 00:00
  • 기자명 권경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실 박준호가 헤이스팅스 생활에 누구보다 빨리 적응할 수 있었던 것도, 1년 예정이던 어학 예비 코스를 5개월 만에 마스터하고 본 학교로 곧바로 편입할 수 있었던 것도, 동양인이라고는 일본 여자 동급생인 하네코밖에 없는 불모지에서 그럭저럭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몸 속에 용들을 불러들이는 열망에 그만큼 노력을 경주한 탓이다.
실제로 박준호는 지금 그 용 반지를 착용하고 있는 중이다.

톰 라더 부인은 생각보다 더 수다스럽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 이상야릇한 감탄사를 수도 없이 반복해서 사용한다.
아무리 어마어마하고 강대하다 해도 바지 위로 만져지는 감촉으로는 결코 만족할 수 없다는 듯이 그녀의 손길이 지퍼를 찾기 시작하고 있다.
내친김에 결정적인 골인의 감동까지 느끼고 말겠다는 기세다.

“오, 하나님!”

박준호는 이제 모든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일종의 자포자기다.
“그래, 내버려 두자. 그 옛날 분이에게 그렇게 했듯 오늘도 그냥 맡겨 버리자.”
바로 그때다. 미니 승용차의 유리문을 밖에서 노크한 것은. 얼핏 사람들의 그림자가 희뜩거리고 있다. 그녀도 박준호도 혼비백산한다.
“뭐예요!”
그녀가 재빨리 옷매무새를 고치고, 자세를 바로 한 뒤 유리문을 연다. 정복을 입은 교통경찰이다.

“도와 드릴 일 있습니까?”
키가 훌쩍 큰 경찰이 묻는다.
“도움 받을 일, 아무것도 없는데요.”
그녀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한데, 왜 이런 곳에 차를 세웠죠? 여긴, 주차해도 된다는 푯말도 보이지 않는데…….”
“알아요.”

그녀가 박준호에게 동요할 필요 없다는 눈짓을 보낸 다음 대답한다.
“비가 너무 많이 쏟아지고 있잖아요.”
“비가 오다뇨?”
어이없다는 듯이 경찰이 어느새 환하게 개어 가는 하늘을 가리킨다. 정말 감쪽같이 개어 있다.
“어쩌면 이럴 수가….”
어느 순간에 그 엄청난 비가 그쳤으며, 고막을 절단 낼 듯이 불어제치던 바람이 멈췄단 말인가. 아니, 비가 그치고 바람이 멈췄다는 사실을 왜 까맣게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박준호는 얼굴이 홧홧 달아오르는 수치심 때문에 몸둘 바를 모른다. 경찰들과 한 번도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박준호는 경찰들이 그녀의 드레스를 열어 볼 것 같은 강박관념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 경찰이 말한다.

“노팬티군요.”
그리고 열아홉 소년과 30대 중반의 여자를 번갈아 본다. 낄낄낄 웃고 있다.
“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하나 그들은 드레스를 젖혀 보지도 않았고, 박준호와 그녀를 번갈아 보지도 않았으며, 더구나 낄낄낄 야릇한 웃음을 흘리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들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 톰 라더 부인의 재치 있는 언변 덕분이었을 게다.

그들은 곧 시동을 걸고 런던 쪽으로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바로 그 순간 박준호는 부리나케 자동차 문을 열고 튀어나온다. 세찬 바람 대신 4월 말의 부드러운 훈풍이 불고 있었고, 쏟아지던 빗줄기 대신 눈부신 햇살이 소나기보다 더 강렬하게 대지를 데우고 있었다.
저작권자 © 경남연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