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중세 유럽의 미친 빵

  • 입력 2014.05.19 00:00
  • 기자명 경남연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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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50여년 전만 하더라도 한국에는 ‘보릿고개’라는 춘궁기가 있었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에서도 가을에 수확한 양식이 바닥나고 햇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은 5~6월에 식량이 모자라서 굶주렸다.

국내에서는 녹색혁명으로 다수확 품종이 농촌진흥청에서 개발되어 생산성이 높아지고, 산업화로 국제 농업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수 백년간의 보릿고개를 극복할 수 있었다. 밀을 주식으로 하는 중세 유럽에서도 비슷한 배고픈 계절이 존재 했는데, 유럽은 7월 한여름이 그랬다.

6~7월은 당시 유럽 농민들이 한해 첫 건초를 수확하는 시기였다. 우기가 닥쳐 건초더미가 젖기 전에 겨울 동안 가축들을 먹일 꼴을 준비하는 것이다. 건초 수확이 끝난 다음, 일년 중 제일 아름다운 유럽의 7월에서 봄에 심은 봄밀의 8월 추수까지는 혹독한 굶주림의 기간이었다. 대부분의 창고에서 곡식이 바닥나고 먹을 것이 사라졌다. 그 기간에 휴가를 즐기는 요즘 유럽인들은 잊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현대 사회에도 그러하듯이, 먹을 것이 줄어들면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큰 고통을 받았다.

7월의 배고픔을 지나면서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의 차이는 더 분명해졌다. 부자들은 7월에도 버틸 수 있을 만큼 곡식이 남아 있거나, 아니면 엄청나게 폭등한 낟알이나 빵을 살 돈이라도 있었다. 그런 형편이 못 되는 많은 사람들은 왕겨, 오래되어 쭈그러든 완두, 콩 등 닥치는 대로 갈아서 만든 조악한 빵을 먹으며 한여름의 지옥상태를 지나게 된다.
아무거나 마구 갈아 먹는 방식은 중세 유럽사람들을 집단 환각에 빠지게 하였다. 농민들은 줄어드는 곡간의 밀가루 대신 산울타리에 흩어져 있는 호밀을 이용하여 빵을 만들어 먹었는데, 맥각병 걸린 호밀도 그냥 사용하였다고 한다.

호밀의 맥각병 곰팡이는 자낭균류(子囊菌類)인 맥각균(Claviceps purpurea)으로, 이에 감염된 호밀 이삭은 녹말을 다 잃고 성장을 멈추게 되며 씨방에는 검은색의 균사체(菌絲體)가 가득한 맥각이 된다. 가루로 만든 맥각에는 ‘리세르그산(Lysergic acid)’이 많은데, 이는 1960년대에 유행한 강력 환각제인 LSD와 같은 물질이다.

이외에도 주위에서 구할 수 있는 양귀비, 대마, 호밀풀 등을 모아 말린 다음, 갈아서 중세시대의 제멋대로 된 갈색 빵이 만들어졌는데, 이 빵을 먹으면 정신이 혼미해지므로 ‘미친 빵’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중세시대 유럽은 7월의 배고픔을 견디기 위해 환각 상태에서 인공적인 천국을 만들어 먹은 셈이다.

중세 유럽 역사에 히스테리 한 민란이 빈번하게 일어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도 아마 잔인한 7월의 굶주림과 미친 빵의 상승작용이 원인이었을 것이다. 어느 시대에서나 배고픔은 발작의 주문을 사람들에게 거는 것과 비슷해 보인다.

농촌진흥청 생물소재공학과 / 이창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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