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숙에세이]아이에게 ‘파랑새’를

  • 입력 2007.06.13 00:00
  • 기자명 권경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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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으로 향한 창문으로 초여름의 미풍과 느긋한 햇살이 흘러들어 왔다.
수업을 마친 뒤라 약간의 여유를 즐기며 아이들의 일기에 댓글을 달면서 아이들의 얼굴들을 떠올려본다.

‘이 녀석은 오늘 국어시간에 엉뚱한 장난을 쳤지!’

‘야단을 좀 쳐줄까?’

‘아니지, 용기를 주면 태도가 변할 거야.’

혼자서 묻고 답하며 지내는 이 시간이 나에게는 재미있고, 아주 특별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다. 그러던 중 코끝이 찡한 편지를 받았다.

알리고 싶지 않은 가정사며, 자기를 버리고 간 얼굴도 모르는 엄마 얘기, 한 달에 두 번 만나는 아빠가 기다려진다는 것과 할아버지와 할머니와의 살아가는 얘기 등을 일기장 가득 써 놓았다.

아이는 나의 모습에서 엄마를 찾고 있는 것 같았다. 수업 시간에 부르면 열없게 웃고 있지만 두려움에 찬 얼굴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던 아이의 힘없는 모습이 일기장위로 떠오른다.

어른들의 무책임이 아이에게 ‘행복’은 잃어버린 숙제장과 같고, 그것은 값비싼 장식품이며, 자기와는 딴 세상의 것으로 알고 살아가고 있었다. 기쁨에는 익숙하지 않고 슬픔은 대개가 다 자기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당연히 자기가 가지고 가야 할 것으로 믿고 있었다.

현대 문명병 가운데 하나가 가정 부재의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도시화, 산업화에 밀려 사회의 근간이 되어야 할 가정이 없어져 가는 것을 조그만 교실에서 간간히 느껴본다. 몇 십년 전에 본 영화 ‘챔프’나 ‘크레이머 대 크레이머’ 두 영화 모두 아이의 감정은 배제한 어른들의 감정 처리로 상처는 아이가 받고, 그로 인한 갈등을 그린 영화로 그 때는 서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으로만 알았던 것이 이미 우리 사회의 문제가 된 지 오래 되었다. 이 시각 곳곳에서 한국판 챔프와 크레이머 부부와 같은 사례들이 일어나고 있다. 모두들 사회 문제로만 치부 할 것인가? 살아가는 지혜를 알려 줄 것인가? 또 다른 아이들에게 행복을 맛보지 못하게 할 것인가? 이 사회에 책임을 가져 보자.

남모르게 혼자 자라는 암울한 감성들이, 아무도 들어 줄 이 없는 아이의 말들이, 저 혼자 민들레 솜털 같이 날았다가 분분히 떨어져서는 삭아 없어졌던 감정들이 이제는 봇물처럼 터져 뱉어 내고 있었다. 호기심으로, 불안하지만 조금의 기대를 가지며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는 너무나도 평범한 행복을 꿈꾸고 있다. 엄마 아빠와 함께 살기 위한 꿈을 가지고 있다.

아이에게 거칠 것 없이 당당한 아침을 맞이할 수 있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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