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에서의생각](2)고독(孤獨), 알싸한 스코올의 향기

  • 입력 2007.06.15 00:00
  • 기자명 이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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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이른 우기(雨期)가 시작되나보다.

작년 이맘때 방콕에 처음 도착한 나를 제일 먼저 반겨 주었던 것이 바로! 이 장대 같은 빗소리였다.

학교에서 임시로 정해준 게스트하우스에 대충 여장을 풀고, 나프탈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은 모포 한 장을 덮는 둥 마는 둥 잠을 청하였다. 그날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낮에 비가 많이 내려 기온이 내려갔다며 살만하다고 했는데, 그래도 나한테는 무더운 열대야인지라 창문을 활짝 열어놓은 채 에어컨을 켰다 껐다 하며 앞으로 남은 2년 동안 이 더위와 어찌 살까 걱정 섞인 각오를 다지고 있던 참이었다. 창밖에서는 3층 건물 높이로 흐드러지게 뻗은 꽃나무 몇 그루가 진한 열대꽃의 향기를 연신 방안으로 살랑살랑 부채질해 넣어 주고 있었고, 오래 비워둔 방 특유의 곰팡내와 꽃향기가 어우러져 묘하게 이국적인 느낌을 자아내고 있었다. 첫 이국생활에 대한 기대감으로 흥분된 마음이 반분이라면 새로운 삶의 무게감에 대한 부담이 반의 반분, 그리고 이유를 설명하기 힘든 고독감과 울적함이 나머지 가슴 한켠을 누르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천지가 무너지는 듯 우당탕탕 쾅쾅 천둥소리가 고막을 찢어놓을 듯 울려대기 시작했다. 연이어 ‘쏴아~’ 하고 집 천장이 내려앉을 듯 장대비가 쏟아진다. 아아, 이것이 열대몬순의 바로 그 ‘스코올(Squall)’이구나! 빗줄기에 떠밀려 들어온 듯 마른 먼지 냄새가 알싸하게 코끝을 스치며 지나간다. 어렸을 적 내가 살던 집에 조그만 다락방이 하나 있었다. 가끔 비좁은 다락 바닥에 엎드려 이런저런 책을 읽곤 했는데. 한여름 소나기가 예고도 없이 내릴 적이면 바깥 길에서 먼지 냄새가 풀썩이며 올라와 코끝에 시큰시큰 얄랑대곤 했다. 그럴 때면 이유 없이 행복하다는 느낌에 하염없이 쪽창 밖의 세상을 내다보곤 했었다. 아직 행복이 뭔지 생각하기 이른 나이였지만, 말할 수 없는 충만감에 그저 바랄 것 없는 기분이 되어 혼자 빙긋이 웃곤 했던 것이다.

축복이었을까? 새 땅에서 맞는 첫날 밤 그리 소담스런 감회를 허락받은 것은 …. 방콕에 도착한 첫날, 난생 처음으로 외국생활을 시작하게 된 나그네의 풋내 나는 객수(客愁)를 잠잠히 달래 준 것이 열대몬순의 세찬 스코올이었으니 ….

마치 저 멀리 바다에서 물을 길어와 양동이로 퍼붓는 것 같다. 빗소리 하도 거창하여 자다 말고 복도로 뛰어나가 숙소의 창문을 열어젖히고서 가로(街路)를 내려다보았다. 인적 끊어진 길 위로 가득 붉은 색 꽃잎들이 빗살에 자근자근 밟히며 화액(花液)을 뿌려대고 있었다.

“나의 고독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

이국땅에서의 첫 밤이 주는 고적감 때문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고독(孤獨)’이라는 말을 읊조렸던 건 …. 나중에 다시 찾아본 인환의 시(詩)에는 ‘나의 시간(時間)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고 되어 있었지만, 그날 나는 가라앉은 알토의 음조로 낙막하게 ‘고독’을 노래하고 있었다.

나의 시간에 스코올과 같은 슬픔이 있다
붉은 지붕 밑으로 향수가 광선을 따라가고
한없이 아름다운 계절이
하의 물결에 씻겨 갔다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지나간 날의 동화를 운율에 맞춰
거리에 화액을 뿌리자
따뜻한 풀잎은 젊은 너의 탄력같이
밤을 지구 밖으로 끌고 간다

지금 그곳에는 코코아의 시장이 있고
과실처럼 기억만을 아는 너의 음향이 들린다
소년들은 뒷골목을 지나 교회에 몸을 감춘다
아세틸렌 냄새는 내가 가는 곳마다
음영같이 따른다

거리는 매일 맥박을 닮아 갔다
베링 해안 같은 나의 마을이
떨어지는 꽃을 그리워한다
황혼처럼 장식한 여인들은 언덕을 지나
바다로 가는 거리를 순백한 식장으로 만든다

전정의 수목 같은 나의 가슴은
베고니아를 끼어안고 기류 속을 나온다
망원경으로 보던 천만의 미소를 회색 외투에
싸아
얼은 크리스마스의 밤길로 걸어 보내자

-박인환 시‘거리’ (1946.12) 전문

박인환(朴寅煥)이 이 시(詩)를 썼을 당시, 해방정국의 국내 형편은 실로 북극해와 연한 베링 해안처럼 건너기 힘든 살얼음판이었다. 하여 그는 코코아의 시장이 열리고 꽃잎이 화액을 뿌려대는 열대의 거리를 상상하였을지 모른다.

지금 내가 그 코코아의, 스코올의 향기 가득한 시간 안에 와 있다. 한국 같지 않게 모든 일이 여유롭고 느린 곳. 하늘에서 물벼락이 쏟아져도 굳이 뛰어 그 비를 피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참 무던한 사람들이다.

물론 그네들에게도 이 땅은 필시 ― 해방기 당시 한국처럼 살얼음판은 아니더라도 ― 살기 힘든 호구(糊口)의 각축장일 터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나그네 된 사람이기에 누리는 호사(豪奢)라 할지, 애초에 고적한 나그네 되기로 작정하고 이 나라를 찾은 다음에야 이국(異國)의 정취에 취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하루하루의 시간이 여유롭고 뿌듯하기만 하다.

지금 내가 사는 집의 정원에는 다람쥐, 새, 두꺼비, 고양이 등등이 마음껏 날고뛰어도 전혀 비좁지 않은 우람한 아름드리 나무와 그 나무 아래 호젓이 자리를 잡은 회백색 불단(佛壇)과 망고, 두리안, 바나나가 심심찮게 열리는 과실수와 일년 내내 알록달록 화려한 웃음을 흘리는 꽃나무가 무성하다.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그 정원 위으로 폭포수처럼 열대의 스코올이 내리고 있다. 이렇듯 우렁차고 장한 빗소리를 밤마다 듣기는 난생 처음이다. 막 자라 오를 것만 같다!

태국 국립 씨나카린위롯 대학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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