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기의 세상읽기]또 다른 ‘쩐의 전쟁’

  • 입력 2007.06.29 00:00
  • 기자명 이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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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에도 경제적인 말이 있다.

꼭 품위를 지키고자 한다면 여러 글자로 된 단어에 심오한 뜻이 들어있는 문장들을 골라 사용해야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여러 글자로 된 문장보다는 짧고 명료한 문장에 글자 수도 적은 말을 사용해야 경제적인 말이다.

미국에서도 인기가 있다는 <쩐의 전쟁>이란 제목의 우리 드라마에서 돈도 전도 아닌 쩐 이라 하는데도 그게 돈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그만한 품위가 있거나 그렇게 비경제적 말을 해도 그럴 만하다고 모두가 인정할 정도가 되어야 될 게 아닌가?

돈도 못되고 전도 못된 쩐보다 못한 지폐를 만들어 놓고 거창하게 화폐라고 을러댄다. 그 쩐보다 못한 화폐가 요즘 우리들을 당황하게 그리고 황당하게 만들고 있다. 당황은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극복되거나 사태를 수습 가능한 경우지만 황당은 수습해지는 것도 아니며 극복이나 수습하려고도 할 필요가 없는 경우를 말한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일천원 권과 일만원 권 새 돈이 나온 지 반 년이 지났다. 시간이 가면 서서히 극복이 되어야 하는데도 어쩐 일인지 자꾸만 시간이 갈수록 헷갈리기만 하니 분명 당황하는 것만으로는 모자란다.

“고객님, 나머지는 카드로 발급할까요?”

요즘 고속도로 톨게이트에서 도로 사용료를 내면 어김없이 판에 박힌 듯 수납직원이 돈을 받으며 하는 소리 가운데 ‘고객님’이란 말이 있다.

귀에 설익은 말이라 계면쩍어 먼 산만 보는데 그 여직원은 건네준 돈을 박스 안으로 가져가지 않고 그대로 든 채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바쁜데 빨리 빨리 좀 하지 않고 뭘 그리 꾸물대느냐 는 표정 같아 조급해진다.

도무지 무슨 소린지 나는 알 수 없어 “모자랍니까?” 내가 물으니, “하 ~아 또, 그것!”이란 표정으로 잘 알겠다는 듯이 두 장의 지폐를 빼내어 도로 돌려주며 빙그레 웃는다. 천 원짜린 줄 알고 만원짜리 두 장을 천 원짜리 지폐와 섞어 같이 주었던 것이다.

이게 벌써 몇 번짼가? 이런 일을 당하는 게, 웃음이 나와야 하는데 부아가 치민다.

전라북도 전주에서 시간을 지체하다 보니 밤늦게 마산에 도착했다. 밤에 보는 새 지폐 천 원 권과 만 원 권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별이 불가능하다. 물론 돈에 새겨진 그림도 다르고 0 개수도 다르며 색도 분명히 다르다. 그런데 내 나이 이제 겨우 60을 조금 넘겼는데 천 원과 만 원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뭔가 내가 크게 잘못되지 않았다면 돈이 크게 잘못 된 것이다.

“내 돈이 없어졌네! 분명 이 지갑에 내가 직접 내 손으로 넣었는데….”

집에 도착하자마자 어머니는 핸드백을 뒤집어 바닥에 쏟아놓고 흩어진 내용물을 헤아려 가며 없어진 돈을 찾으신다. 그런다고 없어졌다는 돈이 새로 튀어 나올 리 없다. 그리고는 그대로 주저앉으셔서 뒤이어 같이 한참 있었던 어느 누구를 의심(?)하는 눈치다. 참다못한 그 몇 번이고 의심받아온 분이 지갑을 뒤지어 돈을 찾아내 확인시켜준다.

“또 그러시네, 여기 만 원짜리 석장이 있지 않아요? 요기요, 요기.”

꼬깃꼬깃 구겨 넣은 새 돈 천원짜리 사이사이에 만원짜리가 세 장 분명 들어 있다.

“쎄(혀)가 만발이나 빠질 놈들이 무슨 돈을 이따우로 만드노?”

자세히 보면 천원짜리는 세종대왕이 그려진 초록빛 만원 권보다 푸른색을 띄며 크기도 작을 뿐 아니라 율곡 선생이 새겨져 있어 두 가지를 한 자리에 갖다놓고 비교하면 구별된다. 노인들이나 눈이 부실한 사람, 특히 밤 불빛 하에는 이 색들로는 서로 구별하기 쉽지 않다.

미안해서 하시는 말씀이지만 실제 구별 못해 버스 타면 버스에서 택시 타면 택시에서 시장 가면 시장에서 자주 망신을 당하신다고 했다. 때로는 당신께서, 택시기사가 그리고 시장 상인들이 혼돈해서 서로 시비가 붙기도 한다.

돈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척 보아 얼마짜린가 바로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게 밤이라 해서 헷갈리고 나이가 좀 들었다고 해서 구별하기가 곤란하다고 한다면 제아무리 최고의 첨단기술로 완벽하게 만들었다고 해도 그건 기본적으로 돈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짜증나는 또 다른 쩐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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