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갤러리]거제 폐왕성

비운의 왕 의종이 머물렀던 곳

  • 입력 2007.09.12 00:00
  • 기자명 이일광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폐왕성이 있는 거제시 둔덕면 거림리는 섬 속의 깊은 내륙이다. 새로 복원된 폐왕성의 높은 성벽 아래 ‘폐왕성지’의 유래를 적어놓은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은 폐왕성을 가리켜 “1170년(의종24년) 정중부 등이 무신난을 일으켰을 때 의종이 이곳으로 쫓겨와 쌓은 것”이라고 한다.

〈고려사〉를 들쳐보면 의종이 무신들에게 쫒겨날 일을 저질렀다.

왕은 원래 성격이 호탕하고 시문(詩文)에 능했단다. 문학과 예술을 좋아했고 결국 문학과 예술이 그를 타락케 했다. 매일 문신들과 함께 잘난 문학을 논하면서 술과 놀이로 방탕한 생활을 보냈다.

그 때의 정경을 그려본다. 술판이 벌어졌다. 기생들도 나왔겠지. 어제 술판에 나왔던 잘난 문예가 또 나온다. “시가 어쩌고저쩌고…” 백성들은 생계가 막막한데, “잘 한다. 잘 해.” 게다가 부정부패로 백성들의 원성은 극에 달했다. 그 꼴불견을 경호하기 위해 연회장 한 켠에서 칼을 들고 지키고 있는 무인들의 심정을 헤아리는 문신이 있었더라면 머리가 좀 잘 돌아가는 이다. 예나 지금이나 칼이 강하지 펜이 강하나?

문신 100명이 무신으로부터 학살을 당했다. 그 중 문극겸(文克謙) 등 몇몇은 머리를 잘 굴려 살아남았다.

대장군 이소응의 뺨을 때리고 정중부의 수염에 불을 질렀던 말단 문신 한뢰(韓賴)는 다급해서 왕에게 달려갔다. 왕으로부터 보호를 받기위해서다. 왕 스스로도 죽을 판인데 머리 안 돌아가는 놈 살려 낼 엄두가 나겠나? 왕의 도포자락을 잡고 부들부들 떨고 있던 그를 반란군 이고가 끌어내 칼로 쳐 죽였다.

의종은 겨우 살아났다. 강경파 군인 이고와 이의민은 그를 죽이자고 했고 온건파인 정중부가 이를 말려 목숨을 부지했다. 의종은 단신으로 말 한필을 얻어 타고 거제도까지 달려왔다. 어머니 공예태후와 의종의 뒤를 이은 왕 명종의 도움으로 가족과 신하들이 뒤따라 거제도에 왔다고 한다. 의종은 거제에 3년간 살았다. 의종 가족과 그를 따르던 이가 살았던 곳을 아직도 고려촌이라고 부른다.

폐왕성은 둔덕면 소재지에서 섬의 내륙으로 한참 들어간다. 해발 326m 높이의 산에 산성이 있다. 성이 있는 산은 더 높은 봉우리를 향해 동쪽으로 비스듬히 올라간다. 산 정상에서 소요하며 거닐기 좋다. 높은 봉우리에서 내려다 보면 아름다운 거제 섬의 사방팔방이 조망된다. 어디까지 보이려나? 꼬불꼬불한 리아식 해안. 폐왕성에서 본 남쪽 바다는 겹겹이 옹기종기 붙어 있는 산 너머에 웅덩이처럼 조금 조금씩 고여 있다. 북쪽을 보면 섬들이 작은 호수에 징검다리처럼 다닥다닥 놓여 있다. 섬을 밟고 껑충껑충 뛰어 다녀도 될 것 같다. 노을이 지는 서쪽은 더 가깝다. 통영해안이다. 아파트촌들이 눈부시다. 통영과 가장 가까운 거리가 견내량인데 그 곳에 육지를 잇는 다리가 놓여져 있다. 육지에 가까운 가장 좁은 해협인 것 같다. 여기에 옛 다리가 있는데 새 다리를 놓아 아직 두 다리가 공존한다. 견내량의 옛 이름은 ‘전하도(殿下渡)’였다. 의종 전하가 배로 건넜다는 뜻이다. 이것 말고도 의종의 흔적을 말해주는 지명들이 몇몇 더 있다. 산방 윗마을에 있는 ‘공주새미’는 공주가 물을 길러 먹었다고 붙여진 이름이고 고려총(高麗塚)은 의종을 따르던 무리들의 무덤이다. 또 고려촌(高麗村) 등.

산 정상에 큰 우물이 있다. 우물은 현재 복구공사 중이다. 우물이 워낙 커서 실제로 이것이 우물인지 연못인지 헷갈리게 한다. 이 우물은 1,300여년 전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지난달 2일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이 원형을 복원해 학계에 보고했다. 우물의 물줄기는 성아래 절 무이사로 이어지는 돌너덜로 이어져 아랫마을 저수지에서 큰 물이 되어 갇힌다. 돌너덜 속의 물은 보일 듯 말 듯 하지만 물소리는 우렁차다.

발굴작업을 한 동아세아문화재연구원의 보고에 따르면 폐왕성의 우물은 최대 16만6천ℓ의 물을 저장할 수 있고, 100명의 주둔 병력이 최대 830일을 사용할 수 있는 시설이다.

성의 규모라든지 우물의 생성연대 등으로 미루어서 의종과 관련된 ‘폐왕성’이라는 데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폐왕성지’ 안내판은 이렇게 적고 있다. “이후 의종은 이곳에서 3년 동안 머물렀는데, 복위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살해되었다.”

왕이 아름다운 거제도에서 지족하고 살았으면 제대로 수를 누렸을 게다. 세속의 미련이 너무 컸다. 육지에서 일어난 어정쩡한 복위운동에 끼어든 것이다. 왕이 섬을 떠나 경주에 도착했을 즈음에 무신 반란군의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경주의 백성들이 폐왕의 편이 아니었다. 이들은 무신 반란군을 도와 의종의 복위를 꾀했던 장순석 일행을 토벌하는 데에 앞장섰다. 의종은 곤원사(坤元寺) 북쪽의 연못가로 유인되어 몇잔의 술을 얻어 마셨다. “흐흐, 마지막 술잔!”

왕은 이들이 내리친 철퇴로 등뼈가 박살이 나 죽었다. 왕의 시신은 곤원사 연못에 내던져졌다. “쯧쯧.”

이일광 기자 ik@gnynews.co.kr
저작권자 © 경남연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