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갤러리]윤이상 영혼 통영에 왔다

윤이상 음악을 만든건 팔할이 통영

  • 입력 2007.09.17 00:00
  • 기자명 이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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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을 그토록 그리던 윤이상 선생을 모시고 통영에 돌아오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생각합니다. 40년 만에 남편의 영혼을 모시고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진정한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오늘이 처음입니다.”

14일 오후 남편의 영정이 모셔진 미래사를 방문한 이 여사는 딸과 함께 불교식으로 남편의 추모제를 올리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는 남편의 영정 앞에서 “그렇게 고향에 오시고 싶어 하더니 제가 왔습니다. 분명 당신과 함께 왔다고 생각하며 이제 한을 푸시고 고향의 따뜻한 정을 느끼고 하늘높이 승천하시길 바랍니다”라며 울먹였다.

통영은 윤이상에게 몽매에도 그리던 고향이다. 서정주 시인은 그의 시 ‘자화상’에서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라고 했는데,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을 키운 건 8할이 고향 통영이다. 이수자 여사는 남편이 자나 깨나 고향생각을 했다고 한다. 고향을 못 와 보고 영면한 것이 그녀에게 천추의 한이라는 말도 했다. 그러므로 “윤이상이 세계적인 음악가가 될 때까지 조국이 그에게 한 일이 없다”고 한 이여사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오히려 “조국 통영이 그를 세계적인 음악가로 만들었다”는 말로 고쳐야 하지 않을까. 조국이 그에게 준 정서적인 영감뿐 아니라 박해까지도 그에게는 음악적 자산이었다.

미래사 여안스님은 추모제를 끝내면서 “윤이상 선생이 통영 용화사에서 들은 것으로 추정되는 음악을 준비했다”며 이여사에게 CD 한 장을 건넸다.

CD에 담긴 음악은 통영 용화사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어산(魚山)인데, 10여년 전에 작고한 스님의 육성 녹음이라고 말했다. 스님은 “윤이상 음악을 깊이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가 용화사에서 들었던 가락이 있었다면 아마 이런 것이 아니었겠느냐”면서 용화사 어산 보유자의 육성녹음을 어렵게 구해 CD로 구은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윤이상의 사무치는 고향생각은 마지막 육성녹음을 통해서도 실감할 수 있다.

“꿈에도 잊지 못하는 충무(통영)의 여러분들. 나는 충무에서 자랐고, 충무에서 귀중한 정신적·정서적인 모든 요소를 내 몸에 지니고 그것을 내 정신과 예술적 기량으로 표현해서 나의 평생 작품을 써 왔습니다. 내가 구라파에서 체재하던 38년 동안 나는 한 번도 충무를 잊어 본적이 없습니다.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바다의 파도소리는 나에게 음악으로 들렸고 풀을 스쳐가는 바람소리도 나에게 음악으로 들렸습니다.”

선생이 말년에 베를린 병원의 병석에 누워 녹음으로 한 말이다. 그는 녹음을 통해 “내 고향땅을 밟기 직전에 건강이 아주 나빠져서 입원했다”며 “내 아름다운 충무시가 더 아름답게 더 깨끗하게 되기를 바라고, 정과정을 통해 충무의 시민들이 단결하고 내 고국의 평화를 위해 전부 노력해 주시기를 간절히 빈다”는 말을 남겼다.

1950년대 전쟁기를 전후해 윤이상이 있던 통영은 문화의 르네상스 시대였다. 기라성같은 문화인물들이 통영을 통해 배출됐다. 유치환, 이영도, 김상옥, 박경리 등의 문인들이 나왔다. 그리고 통영 용화사에서는 효봉문중의 효봉스님과 법정스님, 구산스님, 그리고 작가 고은 등이 불교의 개혁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일제 식민지에 억눌려 있던 우리 문화의 르네상스가 통영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김춘수는 통영의 르네상스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필자는 여름에 해방과 함께 곧 마산의 처가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건너갔다. 그 무렵 객지에 나가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 고향을 찾아왔다. 그 중에 시인 청마 유치환씨가 있었다. 유치환씨를 회장으로 하고 우리는 ‘통영문화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해방된 조국의 고향땅에 우리가 정열을 쏟고 있던 분야에서 뭔가를 해 보려고 애를 썼다. 우리란 유치환씨 외에 음악가 윤이상, 정윤주, 극작가 박재성, 김용기, 시인 김상옥 그리고 전혁림과 필자다. 우리는 그 때 근로자의 자녀를 위하여 야간공민학교 (중학과정)를 경영하기도 하고, 문학, 음악, 연극, 무용, 미술 등 예술의 여러 분야를 망라한 행사를 자주 가졌었고 …”

윤이상은 전쟁 후 50년대 부산사범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며 지금의 이수자 여사를 만나 결혼을 했다. 그리고 1956년 부부가 함께 유럽유학을 떠났다.

이수자여사가 14일 전혁림(92) 화백을 방문한 것은 50여년만의 첫 대면이다. 전 화백은 윤이상부부의 부산 결혼식에 청마 유치환과 함께 하객으로 참가한 적이 있고, 윤이상 부부의 부산 대신동 신혼집에서 6개월동안 머문 적이 있었다.

이여사는 전화백에게 “남편이 살아계셨을때 서로 만나 악수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라며 “어제(13일)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선생의 작품을 봤는데 그때 감개무량했습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전 화백은 이 여사가 머무는 곳에서 항상 통영을 볼 수 있도록 통영항을 배경으로 그린 3호짜리(세로 28㎝.가로 22㎝) 그림 1점을 선물했다.

윤이상의 음악에 색깔이 있다면 당연히 통영의 빛깔이다. 통영의 빛깔은 어떤 색일까. 코발트 블루?

통영출신 시인 김춘수가 통영에서 나서 통영에서 줄곧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전혁림 화백을 위해 쓴 시에 나오는 색깔이다. 콜발트 블루.

‘全畵伯 / 당신 얼굴에는 / 웃니만 하나 남고 / 당신 부인께서는 / 위벽이 하루하루 헐리고 있었지만 / cobalt blue. / 이승의 덧없이 살찐 / 여름 하늘이 / 당신네 지붕위에 / 있었네.’ (김춘수 시 전문)

김춘수는 “그 무렵 (이 시를 쓸 무렵) 전화백의 화폭을 진하게 물들인 그 청색은 그 때 내가 본 충무시의 그 하늘빛이요 특히 물빛이다. 화가로서의 전화백의 뇌리에는 늘 충무 앞바다의 물빛이 그득 괴고 있었지 않았나 싶다”는 말을 했다.

그러면서 “내 시에도 바다가 자주 나오고 그 바다는 언제나 밝고 잔잔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이 말은 “그 잔잔한 바다, 그 푸른 바다의 파도소리는 나에게 음악으로 들렸고 풀을 스쳐가는 바람소리도 나에게 음악으로 들렸다”고 한 윤이상의 말과 상통한다.

이수자여사는 현재 독일 베를린 ‘명예묘지’에 묻힌 남편의 유해를 고향으로 옮길 계획에 대해 “당시 유해를 묘지에 묻으면 이동을 못한다는데 사인을 했지만 언젠가는 고향으로 돌아와 파도소리 들리는 언덕에 묻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이여사는 통영국제 음악제의 명칭문제를 언급하는 자리에서 “윤이상을 기념해 열리는 음악제에 윤이상 작품이 연주되지 않는 것”이 서운해서 “윤이상”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말라고 했다면서 “그렇지만 통영국제음악제가 발전되고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라고 덧붙였다.

진의장 통영 시장은 이날 만찬 자리에서 “충무관광호텔을 최고의 건축전문가에게 의뢰해 윤이상 음악당으로 건축할 계획을 갖고 있으며 도천동 생가 주변을 기념공원으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글·사진 / 이일광 기자 ik@gn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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