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영숙 칼럼]불교계 비리, 큰스님들이 책임져야

  • 입력 2007.09.17 00:00
  • 기자명 권경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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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조연이 아니라 그 스스로 주연이 되는 종교다. 스스로가 곧 부처라는 즉심시불(卽心是佛)의 배를 가르면 자아발견에 따른 개오라는 여의주(如意珠)가 나타난다. 그러므로 개오를 실현하고자 하는 수행자들에게 무얼 지닌다거나 소유한다는 것은 그 스스로 불필요한 종양을 달고 있는 것과 진배없다.

그런 불교계가 온통 비리천국으로 화해 국민적 지탄이 빗발친다. 이유는 간단하다. 불교계의 난립된 각 종단이 지닌 통제적 기능이 약화되거나 인격이나 수행이 덜 된 수행자들을 양산함으로써 생기는 필연적인 역기능이라고 볼 수 있다.

가장 가난해야 할 그들이, 가장 낮은 자세로 살아가야 하는 그들이, 황제보다 더한 사치와 치부를 즐기고 삼보(三寶)라는 오만에 빠져있다는 게 불교가 지닌 고질적인 난치성 종양이다. 볕이 들지 않는 어둠속에서 곰팡이가 서식하듯 투명하지 못한 사찰의 재정이 오늘의 불교를 이 지경으로 만든 절대적 원인균이지만 다른 또 하나는 부처님이 제시한 자아발견은 혓바닥으로 사과 겉핥기식이고 오직 현실타개라는 기복에 매달려 승려들의 법복 속으로 기어들어간 신도들의 무지가 불교를 망친 큰 이유다. 더군다나 오늘날 불교계를 비리의 온상으로 만든 일차적 책임은 이런 문제를 강 건너 불구경하듯 손 놓고 있는 불교종단의 큰스님들이 져야 한다.

이조 오백년을 거치면서 억불숭유의 정책으로 불교계는 탁발과 가난한 양민들의 시주가 산소 호흡기나 링거액처럼 자신들의 생명을 유지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다 보니 수행보다 중요한 것은 목구멍이었고 어떻게 하면 신도들을 구슬려 시주를 많이 바치게 하는 게 더 시급한 당면과제였다. 빈손이나 다름없는 깨닫는 신도보다 기복에 매달려 시주금을 내는 신도가 더 필요했던 것이다.

거짓도 자주하면 큰 거짓말을 하게 되듯 모든 것은 모자람이 아니라 넘치는 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가난을 벗었으면 구습을 버리고 진정한 참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불교는 항아리에 쌀이 넘치는 데도 과거 가난했던 시절의 구걸불교 행태를 벗어나려는 의지가 보이지 않는다. 복과 시주를 맞교환하는 반고오타마적인 괴리 불교는 가장 궁핍하고 초라해야 할 수행자의 심신 모두를 비만증에 걸리게 만들었고 그 결과가 세속의 범죄자와 다름없는 승가의 도둑들을 양산한 것이다. 주지 직을 놓고 생사를 가르는 쌈박질과 법적 다툼까지 불사하며 극단으로 치닫는 이유는 사찰이 수행처가 아니라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물목 좋은 영토며 그 영토에서 시주라는 각종 명목으로 축적된 재물은 아리비안나이트에 나오는 도둑들의 은거지 처럼 ‘새서미(sesame:참깨)’라는 주문 하나만 있으면 호의호식할 수 있는 동굴로 변모했다.

참으로 이유 같지 않은 이유가 아닌가? 머리를 깎고 법의를 입는다는 것은 세속의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발심을 뜻한다. 그런 대신 그분들은 존경과 신뢰를 한 몸에 받는 수행자로 탈바꿈한다. 그럼만큼 출가자들에게는 엄격한 도덕성과 사회적 책임감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불교뿐 아니다. 현실 종교는 성전과 교세의 크기에 따라 고려 말처럼 정치적 파워집단으로 자리 잡았고 서울특별시를 하나님께 봉헌하겠다던 정치인도 선거철이 되니 출가자처럼 절 집을 순례하며 사탄의 표(?)를 구걸하는 구역질나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만일 불교정치인이 그런 실언을 뱉었다면 기독교 사원에 발이나 들여 놓게 했을까? 과연 불교가 자비롭기는 한 모양이다.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사부대중이 공유하는 사원을 사유화하려는 일부 사판승들의 시주금과 국민 혈세인 문화재 기금착취, 싸움질과 도둑질만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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