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벗 삼아 노래 부르고 부처님 뜻 받들어 ‘달마상’ 그린다

  • 입력 2007.07.23 00:00
  • 기자명 이오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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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대사 알현 후 저절로 그려진 달마상, 미래 예견능력 분출

“오세암을 지척에 둔 지점에서 갑자기 휘황찬란한 파란 광채와 함께 달마대사님이 근엄한 모습이 아닌인자한 모습으로 제게 다가 오셨습니다”

함안군 법수면이 고향인 청당(靑堂) 김진석 선생의 예술적 끼는 조부 김대환 옹, 부친 김선규 옹의 영향이었다.

여기다 제당(霽堂) 배강선생(1912~1968)의 혹독한 사사 후 갖춘 실력을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예술을 오직 예술로만 승화시키기 위해 출세와 부(富)를 외면한 채 삿갓을 쓰고 야인(野人)의 삶을 영위하고 있다.

김삿갓으로 거듭난 청당(靑堂) 김진석 선생

時, 書, 畵, 國樂, 歌舞, 演奏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에 관한 모든 장르를 섭렵한 선생은 광적인 자신의 끼를 발산하기 위해 구름을 벗 삼아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면서 전국을 방랑했다. 한마디로 역마살(驛馬煞)이 낀 자신의 운명을 거역하지 못한 셈이다.

청당(靑堂) 김진석 선생이 머리에 삿갓을 쓰고 ‘김삿갓’으로 거듭난 것은 2002년부터다. 선생의 예술성을 극찬하던 수많은 지인들과 달리, 내노라하는 국내 예술계 관계자들은 예술의 세계를 눈대중으로 척도 할 수 없는 현실임에도 물질만능주의 늪에 빠져 견강부회(牽强附會)성격이 적라하게 표출되므로 재학중이던 부산미대를 중퇴, 국전출품까지 외면하는 극단적인 결단을 내렸다.
한마디로 가난한 작가는 재주와 재능이 아무리 특출해도 실력을 인정받을 수 없었다는 것이 선생의 한탄이다.

조선 후기 봉건적인 체제 속에서 남다른 운명을 극복하면서 세상이 보기싫어 삿갓을 쓰고 다녔던 김립 김삿갓(1807~1863)과 일맥상통한다.

선생 역시 자신의 예술세계와 판이한 이견을 보인 예술계에 환멸을 느낀 나머지 자신이 추구하는 예술을 지향하기 위해 삿갓을 쓰기 시작, 결국 200년 만에 김립 ‘김삿갓’이 청당(靑堂) 김삿갓으로 부활하며 21세기를 풍미하고 있다.

그러나 어쩌랴! 몸속에서 끓어 오르는 끼를 억제할 수 없던 선생은 고통의 고뇌로 번민하고 있는 가엾은 민생들을 달래 주기 위해 날마다 밖으로 나돌았으니 가정생활이 순탄할리 만무다.
달마대사 알현 후 신비한 능력 생성

2002년 6월! 선생은 이런저런 구실을 내세워 충만한 신기(神奇)를 받기 위해 설악산 봉정암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세암에서 봉정암에이르는 4km 산행 중, 선생의 눈앞에서 실로 놀라운 현상이 펼쳐졌다.

“오세암을 지척에 둔 지점에 이를 무렵, 갑자기 휘황찬란한 파란 광채와 함께 달마대사님이 근엄한 모습이 아닌 인자한 모습으로 제게 다가 오셨습니다“ “꿈인가? 생시인가? 오른손 집게로 뺨을 힘껏 꼬집어 봤으나 분명 꿈이 아닌 현실 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땅바닥에 엎드려 배례(큰절)를 올렸습니다” 선생은 당시를 설명하며 인터뷰 내내 흥분된 어조를 가라앉히지 못했다.
오세암 예불을 마친 선생은 들뜬 마음으로 봉정암에 안착, 주지스님께 조금전의 상황을 설명하자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선생의 갸륵한 마음을 달마대사께서 알아주셨나 봅니다”라며 합장 했다고 한다.

그리고 봉정암에 유숙하며 선생은 꿈속에서 또 한번 선몽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부처님이 꿈에 나타나‘너의 모든 사리사욕을 버리고 내 제자가 되겠느냐?’ 는 물음에 복명하고 삼배를 드린 뒤 계약서까지 받았다”는 것이다. 이후 붓을 들면 자신도 모르게 그려지는 달마상, 그리고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능력이 활화산처럼 분출되기시작했다.

지난 5월, ‘마산시민의 날’ 행사가 펼쳐졌던 마산종합운동장, 서민을 대상으로 달마상을 그리고 있는데 갑자기 손이 멈춰지고 살기가 엄습했다고 한다. 눈을 드니 23살 청년의 몸에서 매서운 살기가 번졌던것, 이어 선생의 머릿속에는 ‘저 아이는 앞으로 한달 밖에 살지못한다’는 예지(叡智)가 번뜩였다고 한다. 선생은 붓을 멈추고 청년에게 달려가 “젊은이 이리와서 달마대사님을 모셔가라”고 권유하자 “저는 달마그림에 관심도 없고 현재 돈도 없습니다”며 한사코 사양하더란다.

할수 없이 선생은 “당신은 앞으로 한달 밖에 살수 없는 운명”이라고 전해주자 청년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럼 어쩌지요 돈이 없는데”라며 난색을 표명, 결국 청년은 주머니 속의 410원을 내밀었다고 한다.

하지만 얼마나 강한 살이 끼었던지 달마상을 그린 후도 살은 사라지지 않아 최후의 방법인 부적을 곁들인 후에야 비로소 청년의 몸이 평온해졌다고 한다.

한 달 후 청년은 선생 사무실을 예고 없이 방문, “고맙습니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요” 라며연거퍼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꿈속에서 어떤 사람이 ‘너를 데려가지 못하고 그냥 간다’는 이해하지 못할 꿈을 꾼 뒤 비로소 선생님이 일러주셨던 말이 생각났다”며 머리를 조아렸다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고 선생의 달마상을 받아 간 한 서민은 가출한 아들이 20년 만에 귀가하는 기적과, 50평 생 이유없는 불안감으로 살아오던 한 주부는 마음이 편해졌다며 감사의 말을 전해왔다고 한다.

천기(天氣)가 통해야 그려지는 달마상

선생은 달마상을 그리는 수 많은 스님들과 달리 특이한 기법을 선 보인다. 화선지가 아닌 판넬 위에직접 달마상을 그리는가하면, 의뢰인과 달마대사의 기(奇)를 함께 나누기 위해 의뢰인 손을 판넬위에 얹게한 다음 간곡한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드디어 천기(天氣)가 통할 무렵, 굳게 닫혔던 마음의 문이 열리면서 선생의 붓은 약한 듯 강하게 판넬 위를 미끄러지듯 춤추며 인자한 달마상이 서서히 자리를 잡는다. 그림 완성을 앞두고 선생은 또 한번 의뢰인의 생년월일을 하늘에 고하고 이때 의뢰인 역시 자신의 소원을 기원한다.

특히, 의뢰인 중 심신이 나약하다고 판단된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기 위해 한달 1회 지리산, 설악산을찾아 천기(天氣)를 받아 주소지로 부적을 우송해 주기도 한다.

“사람은 누구나 타고난 재주와 갈 길이 따로 있다. 그러나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 이라며 “근본 즉 뿌리가 많은 나무는 잎이 무성하듯 우리가 자신의 뿌리를 망각하고 세상을 산다면 사회의 초라한 구성원일 수 밖에 없다“고 적시했다.

한편, 김삿갓 청당(靑堂) 김진석선생은 국전출품을 외면하고 대신, 1980년 한국전시미술대상전에 입상하면서 우리나라 미술계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3년 한국전시미술대상전에 출품해 특상, 1987년 한국서화전에서도 연이은 특상을 차지했다. 또 1989년 한국전시미술가 대상전 장려상 수상과 함께 1989년 친선 한일문화교류전과 국제미술교류전에 참여하며 선생의 명성이 일본 예술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미 상승 가도에 선 선생은 확고한 작품 활동을 위해 1989년 국제미술제에 참가하며 특선의 영예를 안았고 이어진 1989년 서울 올림픽 서화대전에서도 특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룩하며 명실공히 국전을 능가하는 작가로자리매김 했다.

또 작가들의 열망인 개인전을 위해 선생은 1982년 마산크리스탈호텔에서 제1회 개인전에 이어 1987년 부산호텔에서 제2회 개인전을 개최했다. 또 1992년 서울세종문화회관에서 갖은 제3회 개인전때는 국내 작가는 물론, 프랑스, 일본 등지의 작가들까지 방문하는 성황으로 세계적인 작가임을 다시 한번 입증시켰다.

이제 21세기를 풍미(風靡) 하는 김삿갓으로 거듭난 청당(靑堂) 김진석 선생은 화려했던 과거를 망각하고 “봉정암 유숙시 꿈속에서 부처님과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불우했던 어린 시절을 생각, 향학열은 있으나 빈곤으로학업을 중단 할 수 밖에 없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장애인 단체, 독거노인 등 불우이웃들이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겠다”고 말했다.

이오용기자 abz3800@gn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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