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아의 시네마 블루](18)

절대 고독

  • 입력 2007.09.21 00:00
  • 기자명 이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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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학 전공자라면 누구나 한번쯤 볼 수밖에 없는 <노튼 영문학 개관>의 표지 주인공은 엘리자베스 여왕이다. 하얀 바탕에 작은 얼굴이 파묻힐 듯 목부터 발끝까지 풍선 드레스로 온 몸을 감싸고 있는 이미지는 지금까지도 선명하다. 전 세계 군주들 중에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사람은 또 있었겠으나, 후대 사람들은 유독 그녀를 드라마로 만드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의 삶은 한 인간이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 영화 ‘엘리자베스’(1999)를 보고 나서 남은 건, 결국 인간 삶의 무상이다. 인간이 내딛은 모든 과거의 발자국이 최종적으로 어디를 향해 갔는지 또 한번 우리에게 절실히 다가온다.

절대 군주 엘리자베스는 작은 소망과 기쁨조차 함부로 누릴 권리를 빼앗긴 채, 평생을 마감했다. 오히려 전 유럽의 복잡한 정치 구조와 음모 속에서 내외부의 정적에게 암살당하지 않고, 순명을 할 수 있었던 게 신기할 정도다. 익히 알고 있었으나 얼마 전 읽은 어느 책에서도 엘리자베스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얼마나 자주 거처를 옮기는 등 힘든 현실을 살았는지 말해 주었다. 이미 말 많은 집안의 공주로 태어나 자연인으로 살 수 있는 권리를 박탈당한 것부터 순탄하지 않은 삶을 예고했으나, 그녀를 둘러싼 주변 요인들은 참으로 ‘정치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엘리자베스의 모친 앤 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가톨릭과 인연을 끊었던 것은 한 개인의 욕망뿐 아니라, 한 나라 군주의 독립성과도 관련이 있다. 엘리자베스가 유난히 “나는 아버지의 딸이다.”를 강조하면서 “남자의 심장을 가지길 바라는” 것도 결국 군주로서 독립적인 위치를 차지하려는 대의를 위해서다.

영화는 이런 대의명분과 개인적 욕망 사이에 낀, 한 인간의 삶을 매우 건조하고 적절한 시선으로 다룬다. 오히려 그녀의 평생 사랑이었던 레스터 백작 로버트 더들리가 “사랑하기 때문에” 음모에 휘말리고, 눈물을 흘리며 피폐한 목소리로 “이젠 죽여 달라.”고 간청하는 모습이 과한 감정의 흐름으로 보일 정도다. 뻔히 결과를 알면서도 영화 보는 내내 어째서 로버트 경에게서 눈길을 뗄 수 없었을까? 불현듯 후대에 왕관을 내던지고 신대륙의 이혼녀와 결혼한 엘리자베스의 후손, 에드워드 8세 윈저공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문득 자연인으로 로버트 경과 결혼한 아름다운 공주, 엘리자베스 튜더를 떠올려 본다. 어떤 역사가는 엘리자베스가 절대 권력을 나누기 싫어서 로버트 경과 결혼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로버트 경이 이미 비밀 혼인을 한 유부남이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그의 혼인이나 반역 가담 사실과 무관하게 주변 상황을 보건대 여왕은 프랑스나 스페인, 러시아의 군주와 정략 결혼하여 나라를 지켰어야 했을 것이다. 조금 애매모호하지만 영화에서는 이런 상황에 빠진 그녀의 선택을 수월하기 해주기 위한 배려의 차원에서 로버트 경이 하루밤새 유부남이 되어 나타난다.

신교도 화형, 반역자들 교수형, 끔찍한 전쟁터를 사실적으로 그려낸 장면과 군주의 정치적 자주성을 서로 짜맞춰보면 결국 종교와 정치의 불가사의한 공존과 갈등이 부각된다. 마지막 부분, 반역자를 처단하는 동안 성모상 앞에서 괴로워하던 엘리자베스가 이윽고 머리를 자르고 스스로를 ‘virgin’으로 규정하는 장면은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신교도로서, 영국을 신교국가로 만들기 위해 동정녀 마리아로 표상화 된 구교를 제압하였으나 여왕 스스로 상징적인 동정녀가 됨으로써 잉글랜드의 마리아로 거듭난다. 흔히 외국인들에게 종교에 대해서 함부로 묻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던 적 있을 것이다. 우리는 처음 사람을 만나면, 좋아하는 음식이나 영화를 물어보듯 종교가 무엇이냐고 묻는 걸 과히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듯 박해와 살상을 통해 신앙을 지키고, 때론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해 암살과 음모를 자행한 역사를 지닌 서구인들에게 분명 종교는 우리와 다른 무언가가 있다.

배우들의 연기는 훌륭했다. 케이트 블란쳇은 이미지로만 봤던 엘리자베스 여왕과 너무나 비슷하여 놀라울 정도였다. 조셉 파인즈가 연기한 로버트 경은 매우 현대적인 느낌이 든다. 그의 눈길은 같은 시대 16세기의 영국의 천재 작가(‘세익스피어 인 러브’, 1998), 냉혹한 전쟁터의 소련 장교(‘에너미 앳 더 게이트’ 2001), 16세기 베니스의 한량 청년(‘베니스의 상인’ 2004), 어떤 모습으로도 변함없이 낭만적이다. 영국의 낭만은 이렇듯 고독한 역사위에 태어났단 말인가.

/ 창원대 어학교육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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