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숙 에세이]부활하는 고려장

  • 입력 2007.10.11 00:00
  • 기자명 권경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근도시에서 ‘유등축제’가 한창이다. 해마다 듣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했던 나는 실제로 보고 싶은 마음에 바쁜 일정을 미뤄두고 밤길을 달렸다. 안개 속 같은 밤길을 벗어나니 별천지 같은 세상이 나에게로 쏟아졌다. 다양한 모양과 번뜩이는 생각들을 접하고 보니 창조는 오직 광기와 집념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아름다움은 무균실안의 플라스크에서만 배양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곳이나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름다움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었다.

언젠가 책에서 본 ‘등‘의 의미가 생각난다. 연등으로 어린이를 축복해 주는 이유는 남을 의지 하지 말고 떳떳이 살아가라는 염원에서 였다고 하는데 의존심만 길러주는 요즈음 아이를 위해주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의존심을 단절시키는 그런 교육적 의미가 깔린 연등이었다. 한낱 조그마한 등이지만 부여하는 의미는 원대하고 깊은 부모의 사랑이 흐르는 그런 것이었다.

신분의 고하도 귀천도 가리지 않던 자식사랑 방식이 자연스레 ‘효’라는 의미로 옮겨가던 우리였기에 부모봉양은 당연한 것이었고 상식화 되어있던 진리였다. 얼마 전까지는…

어제 밤늦은 시간 TV를 보고 있자니 황망한 상황을 본 것이다.

부모의 가없던 사랑이 강물처럼 흘러 이제는 자식을 의지 처로 삼고 살아야 할 시기에 낯선 외국에서 버림받는, 억장이 무너지는 혼돈의 시각 속에 머물러 있는 모습을 화면 속에서 맞닥뜨린 나는 낭패감과 열패감을 어찌할 수가 없어 자고 있는 아이들의 방문만 두드려 보았다. 아마도 너희들의 미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나의 말없는 외침이었는지 모른다.

화면 속 노인들은 표현할 수 없는 배신감과 증오를 뒤로한 채, 마음으로 울 수밖에 없는 처지와 아들의 천륜애마저도 부인하며 야멸친 냉대와 학대, 폭력 앞에서 복잡한 개념은 다 버리고 소리 없이 한점 꽃잎 지듯 그렇게 허망하게 사라져 갈 수밖에 없는 모습이었다.

타국에서의 처해진 상황은 주위의 감사한 몇 분들의 도움으로 한정된 절차를 밟고 있었지만 고국 땅의 또 다른 자식들은 일련의 일들을 그저 잘못 밟은 일상의 지뢰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나의 견고하던 가족이라는 틀은 완전히 깨져가고 있음을 느끼는 것조차 서러웠다.

세월의 무게와 깊이가 주는 ‘성숙’ 은 제쳐 놓고라도 원리를 좇아 곧장 환전 될 수 있는 젊은 ‘정보’만을 섬기는 사회에서 ‘부모봉양‘ 은 이미 색이 바란 흑백사진에 불과한 것일까? 세월이 안겨준 지혜와 성숙의 텃밭을 이시대의 젊은이들은 물려받아 가꿀 수는 없는 것일까?

진리는 거창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작고 사소한 변화 끝에 겹겹이 두르고 있는 모든 위선, 가장, 기만의 옷을 벗어던진 존재의 숨김없는 모습을 두고 이르는 말일 것이다. 부모가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패고, 피부는 늘어져 윤곽마저 희미해져 간다고 자식의 고리가 끊어지는 것도 아니요. 어제의 자식이 오늘의 자식 앞에서 좀더 당당해지는 거룩한 월권을 행할 수 있는 신성함을 꿈꾸어 보자.

회색의 사념, 어리석은 욕심으로 시들어 가는 어깨를 추슬러 보자. 살아 있음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살아가는 법을 다시 배우자.
저작권자 © 경남연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