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기 세상읽기]방북(訪北)과 믿음

  • 입력 2007.10.19 00:00
  • 기자명 하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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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신세대는 7.4 공동선언의 충격을 알 턱이 없다.

빨갱이색이라 하여 소방차 이외에는 빨간색조차 쓰지 않았던 시절에 이 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이북을 다녀왔기 때문이었다.

그때 내 나이 20대 후반이었으니 대략 40년 전쯤 된다.

서울 시청에서 가까운 서소문동에 위치한 한일병원 병실에서 입원환자를 돌보고 있었는데 지금으로 치면 긴급 뉴스속보가 있다고 했다.

한 층에 한 개밖에 없던 특실에만 있었던 흑백텔레비전 주위에 의사와 환자 모두 모였다.

방송이 시작되자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직접 출연해 자신이 북을 비밀리에 다녀왔으며 그때 당시 북의 ‘괴수’라 부르던 김일성과 직접 만나 작성했다는 공동선언문을 읽었다.

그 말을 들은 우리들은 처음에 우리의 귀를 의심했고 그 다음엔 정부를 의심했다.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날 수가 없었던 사회분위기였으므로 마치 우리가 집단으로 잘못들은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세력에 의해 군사정부가 뒤집혔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환희와 우려감이 교차하는 가운데서 지금 어떻게 바깥상황이 돌아가고 있는지를 우린 알지 못하고 진행과정만 눈치 보며 살피고 있었다.

2~3일이 지나면서 우리의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는 얼마나 감격해 마지않았는지 모른다.

곧 내일모래쯤 통일이 될 것 같은 환상에 젖어 온 국민들이 흥분했었다.

특히 북쪽에 부모형제와 처자를 두고 온 실향민들의 기쁨은 눈물과 감격 그리고 기대 바로 그것이었다.

“나, 올라 갈기야! 제발 좀 붙잡지 말라 우!”

잠자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 말리는 이곳 부인의 손을 뿌리치고 문을 박차며 밖으로 뛰쳐나가는 실향민도 생겼다.

북에 있는 부모 형제와 처자를 만나겠다며 밤중에 막무가내로 집을 뛰쳐나온다고 했다.

부풀기만 했던 기대와 달리, 시간은 흘러갔건만, 통일로의 진행은 한 뼘도 더 나아가지 않자 목 빠지게 기다리던 사람들은 지쳐서 이상한 기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 했던 것이다.

너무나 엄청나고 갑작스런 충격에 부풀대로 부푼 기대가 희망과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환상을 만들고 실제 그렇게 믿어지게 했던 모양이었다.

그 이후 정부는 정부대로 뭔가 후속조치를 하는 것처럼 보여졌지만 결과적으로 일회용 이벤트로 끝나고야 말았다.

청와대 무장공비사건, 동해 삼척 울진 무장공비사건, 휴전선 땅굴사건 등 공동선언과는 정반대의 일들이 줄줄이 터지면서 남북은 돌아오지 못할 선(?)까지 다시 되돌아가 버렸다.

평화무드를 조성하면서 그들은 적대행위를 준비하고 실행했다는 게 남쪽 주장이었다.

뒤이어 공화국이 바뀌면서 미얀마 아웅산 폭탄테러에 KAL기 폭파사건이 뒤를 잇고 다시는 상종하지 못할 적대관계는 한동안 계속되었다.

천신만고 끝에 군사정권이 물러나 김영삼 정권이 들어서면서 비밀리에 김일성과의 정상회담 계획이 이루어졌지만 정상회담 일주일 전 김일성 주석이 급사함으로서 전쟁당사자와의 직접 회담기회마저 놓쳤다.

공산권의 붕괴, 북한경제의 악화, 서방국가들로부터의 따돌림 등 이때만은 김일성은 아마도 자신이 원해서 작전상(?) 남북 정상회담을 해야 할 필요를 느꼈을런지 모른다.

남쪽 대통령이 북의 실세 국방위원장과의 한반도 평화구축과 통일을 위해 가지는 회담을 우리가 다 함께 기뻐하며 반가워하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7.4공동 성명 후 보여진 것처럼 국민들의 과도한 기대와 시간에 쫒기듯 서두르는 성급한 통일론은 남북 쌍방에 모두 문제가 있다.

대통령이 싫다 해서 방북회담성과를 전적으로 무시하려는 건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매사에는 장단점이 있게 마련이고 회담의 공과는 뒤에 가려질 것이지만 거금을 내면서 절대 양보해서는 안 되는 것이 있으며 또한 얻어내야 하는 것은 당당히 얻어내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남북문제의 최대 변수는 남과 북이 서로 믿지 못하는 게 큰 걸림돌이었다.

이번 노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은 남북 간의 신뢰도 물론 문제다.

그러나 노대통령이 임기 몇 개월을 남겨두고 열린 이 방북 정상회담이 과연 얼마만큼의 성과를 거둘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 쌍방이 합의했을지도 모르는, 밝히지 않는 불분명한 그 비용에 대한 국민들의 낮은 신뢰도가 무엇보다도 문제라면 문제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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