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칼럼]우리 영웅서사극을 유럽시각으로 보기

  • 입력 2007.11.20 00:00
  • 기자명 이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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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의 자식이 칼로 나를 죽이려고 하니, 먼저 그를 죽이지 않으면 그가 도끼로 나를 치겠구나. (…)”

게르만 영웅서사시 ‘힐데브란트의 노래’에서 힐데브란트가 자신의 아들 앞에서 부르는 탄식의 노래다.

게르만민족의 이동시대에 게르만 전설의 영웅 디트리히 폰 베른의 신하인 힐데브란트가 그의 주군을 따라 망명길에 나섰다가 3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온다.

고국의 성문을 지키는 수문장이, 떠날 때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두고 온 자신의 갓난 아들인 줄 알 리가 없는 힐데브란트가 그에게 말을 건다.

“그대의 아버지는 누구이고, 그대의 가문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수문장이 대답한다. “내 아버지의 이름은 힐데브란트. 오래 전에 디트리히와 함께 동쪽으로 떠난…그리고 적들과 용감하게 싸우다가 죽었다고 들었소. 용감한 자들은 그를 잘 알고 있소.”

이 말을 들은 아버지 힐데브란트는 얼마나 감격했겠는가. 수문장에게 자신이 그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리며 설득시키려 한다. 하지만 그의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믿지 않는다. “그대는 간교한 늙은 훈족…. 그대의 말로 나를 덫에 이끌어 창으로 나를 찌르려 할 뿐이오. 그대는 늙어서도 그토록 비열한 짓을 하는군.” 힐데브란트의 부하들이 동요하기 시작한다. “우리 장군이 정말 비열한 것인가?”

힐데브란트는 동요하는 부하들 때문에 창을 들 수밖에 없다. “오, 신이여,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하고 탄식하며 아들에게 창을 겨눈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에 비운의 결투가 벌어진다. 창으로 상대의 방패에 날카로운 소나기 공격을 가격하며, 무기가 그들의 방패를 박살낼 때까지 격렬하게 싸우고 또 싸운다. 결국 힐데브란트의 슬픈 노래는 아들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지난 17일 방영된 KBS1 TV의 ‘대조영’은 아버지와 아들의 결투장면이었다. 아내와 아들을 남겨두고 적진인 당나라로 도망간 아버지 이해고(정보석 분)는 당의 장군이 되어 돌아왔다. 당의 장군과 맞서 싸우는 거란족의 장수는 이해고의 아들 검이(정태우 분)다. 아들의 칼 앞에서 번민하는 장군을 두고 병사들이 동요한다. 아버지가 칼을 뽑아든다. 결투가 벌어진다. 결투의 결말은 부하들의 만류로 성사되지 않는다. 하지만 아들 검이는 다른 적장의 칼에 맞아 심한 부상을 입고 쓰러진다.

‘대조영’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비극적 해후는 ‘힐데브란트의 노래’와 비슷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해고 부자의 싸움은 역사적 팩트가 아니라 가공의 픽션이다.

‘대조영’의 플롯은 고구려의 영웅을 바탕으로 한 데다, 둘 다 역사적 사실(史實)을 철저히 무시한 픽션의 농도가 짙은 세계라는 점에서 MBC TV의 ‘태왕사신기’와 궤를 같이 한다.

그리고 이 두 역사극은 시청률 다툼이 치열하다. ‘대조영’은 패망한 고구려 유민들을 결집해 발해를 세우는 대조영(최수종 분)이 주인공이고, 태왕사신기는 역대 고구려왕 중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한 광개토대왕(배용준 분)을 다룬 드라마다. 이들 드라마를 통해 사극이 나이든 어르신들이나 좋아하는 것이라는 편견이 사라져 가는 중이다.

통계에 따르면 KBS1 ‘대조영’의 시청자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40대 남성이고, 3~50대 남성들의 비중이 31%인데 반해 3~50대 여성은 28%다.

‘태왕사신기’는 어린이들에게 인기가 있을 정도로 인기 연령대가 젊고 넓다. ‘태왕사신기’는 현재 방영되는 ‘대조영’ ‘이산’ 등의 사극들 중에서 2~30대 시청자 구성비가 가장 높은 사극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들 사극이 인기 있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팩트를 이탈한 픽션의 폭이 넓어졌고 시각이 유럽적이라는 데에 있다고 생각된다.

‘태왕사신기’는 한반도 역사에서 유일하게 광활한 대륙 정복을 통해 한민족의 기상을 드높였던 광개토태왕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판타지 서사드라마다. 이 드라마는 고구려 강서고분벽화에 그려져 있는 사신도를 단군신화와 함께 그려냈다. 사신도는 강서고분에서 동쪽벽의 청룡, 서쪽벽의 백호, 남쪽벽의 주작, 북쪽벽의 현무 그림을 말한다.

사신(四神)은 우리나라사람들의 의식 속에 오랫동안 자리잡아온 신물이다. 특히 주거와 음택과 같은 우리 문화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는 풍수지리 사상에서 사신은 그 핵심이 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신이 문학과 같은 예술작품에서 간과되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태왕사신기’는 여러가지 기록적인 이야기 이외에도 이 사신도를 단군신화와 연관지으면서 환상적으로 표현해낸 수작으로 기록될 만 하다. 드라마의 플롯은 두 영웅 담덕과 호개가 사신의 신물을 찾아 모험을 하는 것으로 전개된다.

이는 마치 유럽의 영웅서사시 ‘아더왕의 이야기’나 ‘파르치팔’ 등에서 성배를 찾아 떠나는 기사나, ‘반지의 제왕’ 혹은 ‘니벨룽엔의 반지’ 등에서 반지를 찾아 벌이는 모험 등의 주제와 흡사하다. 이와같이 ‘보물을 찾아 떠나는 모험’이란 유럽적 시각이다. 게르만이나 켈트신화와 같은 유럽신화의 특징이 보물을 찾아 떠나는 모험이듯이 말이다. 그러므로 사신을 찾아 모험을 하는 태왕사신기는 우리 시각의 서사작품이 아니라 유럽식 시각이고 우리신화의 유럽식 해석이라 볼 수 있다.

‘태왕사신기’가 폭넓은 세대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점, 그리고 ‘대조영’이 젊은 세대들에게서 인기 있는 점이 영웅설화를 보는 시각이 유럽적이라는 것이 큰몫을 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요즘 젊은 세대들의 시각이 유럽화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럽화된 시각으로 드라마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문득 알게 된다.

이현도 문화특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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