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봉칼럼]정부의 종북과 국민의 종북은 다른가?

  • 입력 2015.02.10 18:45
  • 수정 2015.02.10 19:20
  • 기자명 /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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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1841년 1월 일본 시코쿠 앞바다에서 어부 다섯 명이 탄 어선이 풍랑에 표류하다 무인도에 좌초했다.

 무인도에서 지내기 143일 만에 그들을 구한 것은 미국선적의 포경선 ‘존 하우랜드’호였다.

 1840~50년대에는 고래잡이가 대성황이었던 모양이다, 구조된 선원 중에는 14세의 소년 ‘만지로’가 타고 있었는데 후일 동료선원들이 일본으로 귀국했지만 이 소년은 포경선에 남았다.

 그는 신들린 듯 신식 어로장비의 기술과 항해술을 습득했고 나중 미국에 정착해 시골중학교에서 영어, 수학, 라틴어를 익혔다.

 당시 일본은 쇄국정책으로 철저히 외국선원이나 선교사들을 국내에 입국하는 것을 봉쇄했고 그들과 접촉만 해도 참수형에 처해지던 시절이었다.

 일본국법으로 만지로는 해외도항금지법으로 중죄인이었지만 5년이 지난 1846년 5월, 일본 근해로 고래잡이를 떠나는 포경선 ‘프랭클린’호에 승선해 근무하다 도항 후 10년 만에 모국 땅 일본을 밟은 만지로는 매국노가 아니라 국가적 영웅으로 돌변했다.

 역시 만지로는 귀국하자 즉시 지방영주들에게 불려가 죄인취급을 받았으나 호기심이 강한 일본영주들은 심문과정에서 그가 겪은 이국의 생활과 해박한 지식에 놀라 수도인 에도의 막부로 보냈다. 처형은커녕 막부에서도 칙사 대접을 받으며 관리에 등용된 것도 국제정세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미국의 페리제독으로부터 줄기차게 개국을 강요받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영어와 라틴어에 익숙한 만지로를 외무성 관리로 발탁한 것이다.

 지난 1854년 미일수호조약의 문안의 번역은 만지로가 맡아서 했고 1855년부터는 일본해군사관학교에서 미국항해서적을 영어로 가르치고 한편으론 항해술을 지도하는 교수로도 근무했다.

 나중에 만지로가 저술한 책들은 일본판 ‘로빈슨 크루소’가 돼 장안의 지가가 폭등할 정도로 청소년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적을 알아야 적을 이길 수 있다는 지피지기면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이라는 병법을 처세술의 달인인 일본인들이 간과할 리 없었다.

 더군다나 만지로가 죽은 뒤 지난 1933년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으로부터 만지로의 장남에게 한 통의 편지가 왔는데 만지로를 처음 구출했던 ‘존 하우랜드’호의 선주가 대통령의 할아버지였다는 것도 일본 조야를 놀라게 했고 일약 ‘만지로’ 가문은 명문가로 발돋음 했다.

 한 평범하고 가난한 소년 어부 만지로가 일본 역사를 바꾸게 하고 세계 속의 일본으로 국격 신분상승에 기여한 공은 일본이 임진, 정유재란 때 천민인 한국의 도공(陶工)들을 얼마나 극진하게 우대했는지 일본도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얼마전 재미동포 신은미씨의 ‘방북콘서트’를 보수언론들, 특히 종편들이 마녀사냥 식으로 ’종북 콘서트‘라고 이름 붙이자 대통령까지 나서서 북한미화는 종북이라며 한 술 더 떠 거들었다.

 그리곤 뒷북치듯 정부는 통일이 ‘대한민국과 북한의 국가 간 대명제다’며 북측에 대화를 촉구하는 정부당국자들의 기자회견을 거창하게 열었다.

 또한 적국 땅 개성에 공단을 만들어 놓고 북한의 저임금에 ‘지화자!’를 연발하는 기업인들에게 종북 기업인이란 매도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불과 100달러(원화 10만원 정도)미만의 월급을 주면서 ‘북한 퍼주기란 궤변’이 참 역설적으로 느껴진다.

 강제출국당한 신은미씨는 내친김에 미국에서 반한활동가로 나섰다고 한다. 이런 빌미는 모두 정부의 설익은 통일정책이 불러온 아전인수나 다를 게 없잖나?

 왜 그렇다면 만날 통일을 주창하는 정부는 신은미씨나 과거 정부 때 북한내부의 최고 기밀을 쥔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를 일본이 ‘만지로’를 이용하는 것처럼 활용하지 못했는지 궁금하다.

 만지로의 활약상은 한 걸음 진일보해 지난 1860년 2월, 처음으로 미국을 순방하는 일본 국적의 전함 ‘칸린’호에 통역으로 승선시켰으며 일본의 사상가이자 진보주의자인 후쿠자와도 동행하게 했다. 적을 알아야 적을 이길 수 있기 때문에.

 걸핏하면 정부스스로는 국법을 어기면서, 국민을 욱죄는 국가보안법이 더 필요한지 따져볼 시점이 아닌가 싶다. 정부의 종북과 국민의 종북은 어느 면에서 뭐가 다른가? 이런 부문에서 한국의 통일외교는 200년 전의 일본 외교에도 못 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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