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봉 칼럼] 이름값을 못한 사람들

  • 입력 2016.07.12 15:36
  • 기자명 /경남연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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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필 김소봉
▲ 주필 김소봉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긴다’라는 말은 살아생전의 족적을 표현한 말이다. 특히 과거 선비라 칭하는 유학자들은 이름을 지키기 위해 모든 명운을 걸었다. 인간의 타인을 향한 분노나 살의는 거의 조상이나 자신의 이름을 상대가 무시한 데 따른 물리적 표현이자 행동이었다.

 이름은 가장 신성한 인격체이자 자신의 모든 자존심이 걸린 무형의 생명체다. 유학의 본고장인 중국에서는 이름이 바로 신앙이나 다를 게 없었다. 부조(父祖)의 함자에 대한 외경은 피휘(避諱)라는 풍습을 낳았다. 피란 피한다는 뜻이고 휘란 살아계시거나 별세한 부모님의 이름을 존중하는 단어로 부모님의 이름자를 자식이나 후손이 쓰지 않는다는 뜻이다. 휘는 곧 부모님의 아호나 당호, 함자이기 때문에 피휘를 하지 않는 것은 가장 큰 불효에 해당되는 것으로 간주돼 왔다.

 유학의 본고지인 동양 뿐 아니라 서양에서도 가문의 영광은 곧 이름으로 이어져왔다.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에 관한 전쟁사, 역사(Historiae)를 편찬한 헤로도토스(Herodotos/BC 430~420)는 그가 후대에 남기고자 한 조언에서 “어떤 사람들은 마지막 최종 목적지에서 낙마하고 어떤 이들은 인생의 막바지에서 승리를 거머쥔다.”라고 했다. 즉 말의 무게를 저울질하지 못한 사람들을 향한 강력한 메시지이자 충고였다.

 동양 역사학의 태두로 일컫는 사마천 역시 피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 부친의 함자가 담(談)이였기에 사기(史記)에도 조 맹담(孟談)을 맹동(孟同)으로 조 담(趙談)을 조 동(趙同)으로 적었다고 전해진다. 명필로 소문난 왕휘지 역시 아버지의 이름이 정(正)이었기 때문에 정월을 일월(一月)로 표기했고 정(正)자가 들어간 문장은 정(政)으로 바꿔 썼다고 한다. 시성(詩聖)이라는 두보 역시 그 부친의 함자가 한(閑)이어서 평생 한(閑)자를 쓰지 못했다는데 당시 시인묵객들이 가장 자주 인용하는 글자를 쓰지 못했던 두보의 답답한 심중을 헤아려 본다.

 그 피휘를 피하지 못해 출세 길에서 멀어진 비극적인 인물도 있었다. 이하(李賀)라는 선비는 부친의 함자가 진숙(晋肅)이었는데 진사과(進士科)라는 과거 초시에 응했을 때 죽마고우인 한퇴지(韓退之)가 부친의 이름과 진사과의 진자가 소리가 같다며 응시를 만류했다. 그런데도 응시해 장원급제했으나 사람들이 부모의 이름자를 더럽힌 불효자라며 떠들자 출세 길이 자동으로 막혀 벼슬에서 낙마한 희극적이면서도 비극적인 예도 있었다.

 지금 모든 미디어매체는 물론 온 국민들이 교육인적자원부의 정책기획관이었던 나향욱 씨의 부적절한 발언을 두고 뭇매를 가하는 중이다. 북한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같았으면 진즉 화염방사기나 기관총으로 공중분해 됐어야 할 분인데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면 그래도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게 맞기는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언급한 1%는 나향욱 씨 같은 부류의 정치형인 해바라기 공직자들이고 99%의 공직자들은 이 염천에도 땀 흘리며 민생의 현장에서 공복으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공직자들이란 걸 국민들은 확신하고 있다.

 나 정책기획관의 표현은 실언이 아니라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한 자화상의 일부에 불과하지 않은가? 말이란 잘하면 천량 빚도 탕감케 하나 이렇듯 잘못하면 명줄이 끊기는 게 마련이다.

 나향욱 씨가 신분상승제를 언급하지 않아도 대한민국은 개국 이래 신분상승제가 존속돼 왔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서도 왕따가 다반사고 재벌과 공직자나 권력기관은 서민들에 비해 신분상승의 혜택을 흠씬 받고 있지 않나? 또한 사회의 어느 조직도 갑질의 횡포가 없는 곳은 없다.

 이름값을 못한다는 말은 아마도 이런 사람들을 지적한 말인데도 사회지도층의 자리에 있는 분들의 언행이 이정도 밖에 안 된다면 공복이라고 떠드는 대다수 정치인들의 자화자찬에 허탈감을 느낀다.

 공무원 2급은 이사관으로 옛적이면 당상관인 판서의 직급이었고 나 향욱 씨가 행정고시를 통과했다면 대과에 급제한 것이나 다를 게 없다. 나 전 이사관의 프로필을 보면 청와대 행정관도 거쳤는데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한 측근 경력도 있는 이분은 공직을 권력으로 착각한 과대망상증에 걸린 치명적인 병세를 지녔거나 때를 잘못타고 태어난 분 같다.

 폭정의 대명사로 유명한 연산군은 ‘입은 화’의 근본이라는 명패를 신하들 목에 걸도록 했다는 데 나 이사관이 그 당시에 태어나 벼슬을 했다면 유자광과 더불어 사초에 오를 유명세를 누렸을 터인데 애석하다. 그러나 그의 비석에 가래 침이나 오줌세례는 있어도 엎드려 칭송의 읍을 올리는 백성들은 없었겠지? 더군다나 이분의 고향이 마산이라는데 민주주의 진원지라는 고향의 이미지에 먹칠은 고사하고 참 이름값을 못한 사람으로 생각돼 조금은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나향욱 씨가 살아야 할 남은여생도 개, 돼지의 삶과 다를 게 없을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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