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아의 시네마 블루](51)

그리움은 블루 성월동화

  • 입력 2008.05.16 00:00
  • 기자명 문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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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모든 것을 버리고 완전히 새로 시작해야 할 때도 있어요.” 한 남자가 한 여자에게 미소를 머금고 건네는 말이다. 문득 5월의 무성한 신록이 원래는 1월의 앙상하고 메마른 가지에서 시작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영화 ‘두 번째 사랑’(2007)에는 봄과 겨울, 5월과 1월, 생명과 죽음이라는 계절의 섭리가 그대로 녹아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아가는 두 남녀의 만남 뒤에는 가끔씩 양분을 주는 비가 내리고 그들은 기꺼이 그 비를 온몸으로 맞는다. 사실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 시작해야 할 때”를 외면하지 않은 그들의 행로는 ‘두 번째 사랑’이라는 상투적인 타이틀로는 부족하지만 멋진 연기와 연출, 은근한 음악으로 이 영화는 거의 완벽에 가깝게 탄생했다.

한국인 불법체류자 지하(하정우)와 백인 중산층 소피(베라 파미가)가 처음 만난 곳은 불임클리닉이다. 뉴욕에서 태어난 한국인 남자, 앤드류와 결혼한 소피는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막막한 상황에 처해 있다. 시어머니는 기도 회합 자리에서 “나는 40일간 단식기도를 해서 앤드류를 얻었다.”는 말로 은연중에 압박을 가한다. 성공적인 비즈니스 커리어를 쌓아가는 남편은 동료 아기의 생일 파티에 다녀와서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기도한다.

기도를 가르쳐 달라는 소피에게 그것으로 아기가 생기는 건 아니라고 냉소적으로 대답했던 앤드류도 실은 자괴감에 시달려 살아간다.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남성적 존재의 불안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자신을 죽여서라도 보상받아야 할 강한 생명의 의지로 변한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인 자기애는 소피를 숨 막히게 만들고 자기 존재를 상실하도록 몰아간다. 이런 와중에 절망 끝의 선택을 했던 소피는 오히려 지하와의 만남으로 시나브로 죽음의 세상에서 생명의 입구로 들어선다.

지하는 여러 직업을 전전하면서 돈을 벌어 한국의 여자친구를 데려오기 위해 노력하지만 결국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불임클리닉에 정자를 기증할 수 있는 자격도 얻지 못한다. 둘이 서로의 아픈 상처를 건드릴 때 소피는 그에게 “그나마 너를 받아주는 게 나밖에 없다.”라고, 지하는 “그렇게 행복한데 내가 필요한 거냐.”고 응수한다. 이렇게 둘은 처음으로 자기 상처를 드러냄으로써 그간의 물리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진지한 교감의 관계로 발전한다.

“삶에서 가장 원하는 게 뭐예요?”
“사랑하는 사람들이 상처받지 않도록 해주는 거죠. 그런데 난 늘 실패했어요.”
“그러면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요?”
지하는 소피 스스로가 외면한 타자적 자아를 일깨우고 그 존재를 사랑하라고 간접적 명령을 내린다. 내 가장 가까이에 있는 건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내 안에 억압된 또 다른 나이다. 영화에서 피아노 치는 인물이 옆 거울에 비치는 장면이 두 번 나오는데, 이는 바로 그 타자를 표면화시키는 순간이다. 한번은 앤드류가 피아노를 치고 있을 때, 그 모습이 거울에 비치면서 그것을 바라보는 소피의 옆으로 배치된다. 그런데 마치 두 사람아 전혀 다른 공간에 각기 존재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또 소피가 피아노를 치는 모습이 그대로 옆의 거울에 비치는 장면이 있는데, 이 때 거울에 비친 소피는 전혀 다른 존재로 다가온다.

이렇듯 음향 효과, 배경 음악, 절절한 대사 없이 카메라 워크 만으로도 관객의 정서를 건드리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가령, 인물을 한쪽 모서리에 몰아넣고 줌인, 줌아웃을 반복하는 순간이 등장하는데 감독은 이를 통해 주인공들의 내면을 압박하여 그 가슴까지 파고들려는 조용하지만 대담한 시도를 하고 있는 셈이다.

소피의 큰 변화는 임신에서 시작한다. 이제 생명의 차원에 들어선 소피는 더 이상 앤드류라는 죽음의 세상에 머물지 못한다. 지하와의 교감을 처음 느꼈던 그 날, 흔들리는 칵테일 잔은 역시 내부적 지각 변동을 하는 소피의 심리를 반영하며 이 장면 위로 생명과 환희의 가쁜 숨소리가 흐른다. 생명의 원리인 에로스를 방해하는 것은 언제나 무미건조한 법률이다. 남편의 신고로 경찰에 끌려가 강제추방당할 위기에서 지하는 자기 전화기에 전화를 걸고, 마침 남편을 떠나 거기에 왔던 소피가 전화를 받는다. 마치 태아의 심장소리처럼 들려오던 그 전화벨과 진동.

남편의 폭력으로 아슬아슬한 위기의 순간이 오자, 기도할 줄 모른다던 소피는 “주여, 내 아이를 지켜주소서.”라고 큰 소리로 외친다. 생명의 세상은 그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비로소 문을 열어준다. 영화는 서너 살쯤 된 아들 준과 소피가 바닷가에서 뛰어 놀면서 작은 물고기를 큰 바다로 내보내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그녀의 뱃속에는 둘째 아기가 자란다. 탯줄 같은 빨간 실로 뜨개질을 하며 카메라를 향해 신비한 미소를 보내는 그녀. 여기는 자기 고향을 닮았다며 지하가 벽에 붙여놨던 그 사진속의 바닷가다. 이제 그들은 정녕 생명의 고향으로 왔다. 모든 걸 버리고 새로 시작한 삶은 바로 자유롭게 유영하는 바닷속 물고기! 내 안의 생명을 깨우는 그대 모습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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