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개망초 골짜기 ⑧

  • 입력 2006.05.08 00:00
  • 기자명 권경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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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떻게 설명해야 제 얘기를 이해하시겠습니까? 아니 누구를 상대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고발하라는 말씀입니까?”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주권 국가다.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조목조목 이해시키고 동조를 받아내야지. 그러고 나서 미국을 상대로”

“대한민국 정부라구요? 아닙니다, 아버지. 대한민국 정부 관리들은 한결같이 눈치 보기 바쁩니다. 잘못 보였다가 무슨 화를 입을까, 무슨 불이익이 있을까, 전전긍긍하는 상황이 아니라 아예 한 수 더 떠서, 양민 학살 운운하는 양심 있는 인사들을 ‘빨갱이 집단’으로 몰아 감옥에 처넣는 수준 아닙니까? 이건 쓸개조차 빼 버린 흉측한 철면피라구요. 그런 철면피들을 상대로 뭘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결국은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한다. 언제나처럼 할아버지도 작은아버지도 지쳤는지, 갑자기 사위가 조용해진다. 누가 이기기를 원했던 것도, 누구에게 더 많은 성원을 보낸 것도 아닌데, 박준호는 괜히 가슴이 답답하다. 괜히 이마에 땀방울이 맺힌다.
벌렁 드러누웠지만 잠도 오지 않는다.

“이럴 땐 어머니라도 옆에 있으면 좋으련만…”
하지만 그 무렵 박준호는 어머니와 함께 살지 못한다. 아니, 아버지가 죽고 난 그 이듬해부터 박준호는 어머니와 떨어져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어머니가 다시 미국 극동 사령부 군속 자리를 얻어 일본 오키나와로 거처를 옮겼기 때문이다.

박준호는 벌떡 일어난다. 할아버지가 억지로 안겨 준 패물함을 깊숙이 집어넣고, 살금살금 고양이 걸음으로 나온다. 태훈이를 찾아가기 위해서다. 태훈이는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한반이었지만, 박준호가 투병으로 휴학을 했기 때문에 박준호 보다 먼저 중학생이 된 친구다.
하나 태훈이가 진학한 중학교를 박준호도 똑같이 찾아올라 갔으므로 여전히 둘도 없는 단짝이 되어 지내는 사이다.

집도 가깝다. 버스로 한 정거장이다. 더구나 태훈이 집에는 어른이 없다. 태훈이 아버지도 군인 장교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늘 전방으로 돌아다닌 탓으로 아버지는 한 달에 한 번 집에 올까말까다. 대신 어머니가 사흘이 멀다고 전방의 아버지 숙소와 서울집을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는 터다.
그러니까 태훈이 집에는 늘 아이들만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일까. 태훈이 집 아이들은 밥을 잘한다. 태훈이도 잘하고, 태훈이 여동생, 남동생도 다 잘한다.

어머니가 항상 반찬은 잔뜩 만들어 놓곤 했으므로 누구라도 냄비밥만 석유곤로에 지어 놓으면 그만이다. 어떤 때는 미처 밥상을 차릴 여가도 없다. 부엌에 빙 둘러 앉아 후다닥 냄비밥을 비우고 학교로 내달리고는 한다.

저녁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다. 제가끔 부엌을 들락거리며 끼니를 때우는 것이 그 집 아이들의 습관이다.
태훈이는 준호의 방문을 그렇게 반가워할 수가 없다. 밤이건, 일요일 아침이건 늘 맨발로 뛰어나와 반겨 주곤 한다. 아마도 부모와 함께 생활하지 못하는 비슷한 처지의 동질감일 터다.
박준호는 태훈이와 한 이불 속에 누워 도란도란 얘기하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동생들도 잠들고, 전등불도 끈 깊은 밤, 막 버스의 질주가 문창살을 털털 떨게 할 때, 누군가 말문을 연다.

“이제 곧 통행금지 사이렌 울리겠지?”
그러고 보니 책상 위의 야광 탁상시계 눈금이 어느새 자정을 가리키고 있다.
“그래, 울릴 거야. 서둘러!”
약속이나 한 듯이 박준호도 태훈이도 똑같이 이불을 뒤집어 써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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