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7주년] 우리軍의 최초 ‘통영상륙작전’

  • 입력 2017.06.22 20:50
  • 수정 2017.06.22 21:00
  • 기자명 /이오용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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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
1950년 9월 15일 새벽 2시

‘통영상륙작전’
1950년 8월 17일 새벽 3시
김성은 부대가 이끈 최초 상륙작전
우리 해군·해병, 통영 탈환 ‘성공’

 

▲ 박진나루전투
▲ 박진나루전투

 ‘대한민국’ 내 조국을 수호하기 위해 피 맺힌 희생을 불사한 6·25 참전 용사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한국전쟁 67주년 기념 식이 오는 25일 전국 각지에서 엄수된다. 한국전쟁 중 낙동강방어선에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은 백선엽 장군 이 지휘했던 경북 칠곡군 다부동·왜관 철교 전투, 경남에서는 낙동강 돌출부인 박진나루, 영산지구, 함안 여항산, 진동 리 전투 등이 손꼽힌다.

본지는 ‘6·25전쟁 발발 67주년’을 맞아 다부동 전투와 경남 전투지역을 돌아보 고 참전용사들의 희생과 헌신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을 갖기 위해 6·25특집을 마 련했다. /편집자주

 

◇ 통영상륙작전

 올해 한국전쟁 67주년을 맞아 대다수 국민들은 상륙작전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 장군이 지휘한 인천상륙작전만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 국군 자력만으로 우리나라 최초 상륙작전은 김성은(金聖恩)부대가 이끈 통영상륙작전이다.


 인천상륙작전은 1950년 9월 15일 새벽 2시에 전개됐지만 통영상륙작전은 이보다 한 달 가량 앞선 1950년 8월 17일 새벽에 3시에 감행됐다. 통영상륙작전은 1950년 6·25전쟁 중 해병대 김성은 부대가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는 통영반도에 첫 적전상륙작전을 통해 통영을 탈환한 작전이다.


 1950년 8월 전선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우리 군과 적은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반복됐다. 8월 17일 새벽 김성은 부대는 해군함정 512정과 평택호에 나눠 탑승, 통영반도 동북방 1km 지점에 있는 거제도 북방 연안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제도 서해안을 방어하는 것 보다 통영반도에 상륙해 적을 섬멸하는 것이 작전상 유리하다고 판단, 통영 근해를 경비하던 해군함정의 지원 아래 17일 오후 6시 장평리(통영반도 동북방)에 상륙을 개시했다.


 당시 북한군은 해병대가 통영항구 정면으로 상륙할 것으로 예상해 고지에 배치했던 병력을 통영 남해안 일대 해안선에 집결시켰기에 접전 없이 상륙할 수 있었다. 상륙을 완료한 해병대는 18일 새벽 제2중대가 원문고개에 방어진을 구축했다. 제7중대는 통영전투 승패가 갈리는 매일봉을 점령했다. 이에 당황한 적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해병대의 19일 오전 통영시내 소탕작전을 통해 소탕 됐다. 통영상륙작전은 우리 해군·해병이 최초로 성공시킨 단독 상륙작전이다.


 당시 상륙작전을 취재하던 외국 종군기자들이 한국 해병대의 용맹함을 ‘귀신 잡는 해병’이라고 표현 했다.

 

▲ 통영상륙작전
▲ 통영상륙작전

 

◇ 다부동 전투

 다부동 전투는 하루에도 몇 번씩 고지 주인이 바뀌는 한국전쟁 최대의 격전지였다. 당시 이곳에선 대구를 확보하려는 북한군과 이를 지연시키려는 아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다.


 낙동강을 건넌 북한군은 4개 사단으로 편성된 2만 1000명의 병력으로 대구를 향해 총공격에 나섰고, 국군 1사단과 미군 27연대는 다부동에서 8200명의 병력으로 적에 맞섰다. 위기에 처한 국군은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내가 돌아서면 나에게 총을 쏘고, 너희들이 돌아서면 내가 총을 쏘겠다”는 백선엽 1사단장의 독려에 힘입어 세배에 달하는 북한군을 막아냈다. 55일간 이어진 전투과정에서 고지의 주인이 수십차례 바뀌었고 아군 8700명, 적군 1만 7500명이 죽거나 다쳤다.

 

▲ 8사단 장병들의 포격장면.
▲ 8사단 장병들의 포격장면.


◇ 박진나루터 전투

 박진나루터 지구전투는 1950년 8월 6일부터 10월 4일까지 박진나루가 있는 곳에서 벌어진 전투다. 인민군은 새벽 0시 시남리 이이목나루를 도하한 다음 시남 수개 고곡 등 산야에 은신하고 있었으므로 고곡을 거쳐 대곡까지 진출하려는 미군에게 맹렬한 사격으로 공격을 가했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미군은 많은 사상자만 내고 월하까지의 진출은 좌절되고 말았다. 미군 제2사단과 제24사단이 북한군 제4사단과 치열한 전투, 이곳이 무너지면 밀양과 부산은 물론 나라전체가 순식간에 점령당하는 최후의 보루인 셈이었다.


 왜관·다부동 전투가 대구지역을 사수하기 위한 방어였다면, 이곳 박진·영산지구 전투는 마산과 부산을 지키기 위해 북한군과 미군이 40일간 사투를 벌였던 격전지다. 당시 북한의 최정예부대인 제4사단이 야간에 기습 침투해 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고, 한때는 영산면까지 밀리기도 했으나, 일진일퇴의 치열한 혈투 끝에 낙동강을 사수했다.


 북한군의 시체가 낙동강물 따라 사단병력이 떠내려간 곳이며 박진전투에 승리함으로 아군이 낙동강을 건너 반격하게 됐으며 결국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과 함께 압록강까지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창녕군 남지읍 월하리에 있는 한국전쟁 때의 박진지구전투를 기리기 위해 세운 전쟁기념관이 자리해 있다.


 창녕군 남지읍 월하리 월상초등학교 폐교 부지에 세운 박진전쟁기념관은 부지면적 9781㎡, 건축총면적 722.13㎡의 지상 1층 건물이다. 1999년 6월 육군본부로부터 건립승인을 받은 후 2003년 11월 준공해 2004년 6월 25일 개관했다. 기념관 건립에 투여된 사업비는 약 34억 원이다.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월요일, 공휴일 다음날, 설날·추석 연휴, 1월 1일에는 휴관한다. 박진전쟁기념관 바로 앞의 야트막한 산으로 약 10분 정도 올라가면 산봉우리에 1987년 11월 27일 건립된 박진지구전적비가 박진나루가 내려다보며 서 있다. 

 

▲ 인천상륙작전
▲ 인천상륙작전


◇ 생비량전투

 북괴군은 남침 1개월 만에 전북 무주까지 밀고 내려왔고 1950년 8월 10일께 진주를 점령한 북괴군 6사단(사단장 방호산) 2000여 명이 서부 경남의 중심지인 진주에 지휘 거점을 두고 마산을 침공할 작전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 산청부대(경찰관·의용대)는 모두 마산에서 가까운 지역으로 후퇴하게 됐다. 산청경찰서 생비량지서장 구회상경위도 부하 경찰병력을 이끌고 산청부대에 합류해 있었다.


 북괴군은 함안군을 점령하자 그 여세를 몰아 마산까지 침공하기 위해 공세를 감행했으나 미 전투기 21대가 연 이틀동안 적의 집결지에 대해 맹렬한 폭격과 기관포 사격을 가하자 수백명의 희생자를 낸 끝에 마산 공격 계획을 보류한 채 후퇴하게 된다. 이 함안 전투에서 산청부대 전공이 미 8군 사령부에까지 알려져 미 8군 사령관이 직접 상을 줬고, 경남경찰 전투사령관 표창도 받았다.

 

▲ 학도병에 지원한 젊은이들.
▲ 학도병에 지원한 젊은이들.


 
◇ 여항산전투

 6·25전쟁의 격전지였던 함안 여항지구는 여항산(770m)과 서북산(739m) 일원을 최후의 보루로 삼고 1950년 8월 미군 제25사단과 함안군민이 적군 2만명과 19차례 고지를 뺏고 뺏기는 혈전을 치르며 많은 사상자를 내고 끝까지 지켜낸 곳으로, 영남지역의 대표적 6·25 전투사 중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 거창전투

 1950년 7월 24일부터 27일까지 국군 제7사단과 해병대가 남원에서 거창 방면으로 진격해온 북한군 제4사단과 맞서 싸운 전투이다. 북한군이 호남에서 영남 지역으로 진격해오는 것을 지연시켜서 낙동강 서남부의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7월 27일 북한군 제4사단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長溪面)에서 경남 함양군 안의면(安義面)으로 향하는 경로를 따라 진격해왔다. 국군은 육십령(六十嶺)에서 북한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으나, 병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안의면으로 물러났다.

 

 국군은 미 제24사단 제19연대의 지원을 받아 안의면에서 다시 방어선을 구축했지만, 이곳에서도 패해 함양으로 철수했다. 미군 병력도 큰 피해를 입고 거창으로 철수했다.


 거창 전투에서 국군은 부족한 병력으로도 소백산지의 험한 지형을 이용해 북한군의 진격을 최대한 늦추려 했다. 하지만 호남과 영남을 잇는 주요 교통로 가운데 하나인 남원-거창 도로가 북한군에게 장악되면서 결국 함양과 거창 등지도 북한군의 손으로 넘어갔다. 그 뒤 국군은 산청에서 진주로 이어지는 도로에 방어선을 구축해 북한군의 진격을 막으려 했고, 미군은 함안과 합천 등에 주둔하며 낙동강 서남부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주력했다.


◇ 진동전투

 6·25 전쟁 때의 마산 지역 전투는 두 가지로 나뉜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라고도 불리는 진동 지구 전투와 미군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 전투이다.


 진동 지구 전투는 낙동강 전선의 중요 지점으로 8월 초부터 9월까지 한 달 여 동안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김성은 해병 부대는 8월 1일 함안군 여항면 고사리 쪽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마산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던 북한군을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에서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북한군은 전차를 앞세우고 고성군 회화면 배둔리를 거쳐 마산 방면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김성은 부대는 북한군을 기습 공격해 전차 2대와 각종 병기를 노획했다. 북한군 87명을 사살하고 3명을 포로로 잡는 승전을 거두었다. 마산합포구 진전면 고사리에서의 승전은 6·25 전쟁 발발 이후 파죽지세로 진격해 온 북한군 공격 기세를 꺾는 전투였다. 


 당시 미 육군 제27연대는 마산-진동 간의 국도에서 보급로 확보를 위해 연일 고전하고 있었다. 8월 6일 새벽 북한군이 1개 연대 병력을 동원해 야반산 고지를 점령했고, 미 27연대는 반격했지만 실패했다. 이에 김성은 부대는 치열한 육박전 끝에 고지를 탈환하고 미군에게 인계한 후 8월 7일 마산으로 철수했다.


 진해 해군 통제부로부터 병력을 보충 받은 김성은 부대는 제7사단 민기석 부대와 경찰 부대 등과 함께 마산-진동 간의 보급로 확보를 둘러싸고 연일 처절한 혈전을 벌이다가 8월 10일 북한군을 격퇴했다. 11일에는 서북산 능선을 따라 포진해 있던 북한군을 총공격으로 전멸시키고 서북산 능선을 미 제25사단에 인계했다.


 미 제25사단을 중심으로 한 유엔군은 진주 지역을 점령하고 마산으로 진격한 북한군 6사단과 마산합포구 진동면 진동리와 함안군 여항산에 이르는 마산합포구 진북면과 마산회원구 진전면의 고지에서 일진일퇴의 전쟁이 전개되고 있었다. 


 유엔군은 8월 9일 진동리 주변의 북한군을 소멸시켰지만 8월 19일 북한군 제6사단은 마산을 점령하기 위해 진동리에서 군북에 이르는 모든 전선에서 총공격을 감행했다. 9월 14일까지 일진일퇴를 거듭하다가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을 고비로 전세는 역전됐고 북한 인민군의 마산 공격은 좌절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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