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해희, 수필 ‘오일장 소싸움’ 5부

  • 입력 2018.02.25 13:52
  • 수정 2018.02.25 16:08
  • 기자명 /정리 심혜정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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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山海 윤해희 선생
▲ 山海 윤해희 선생

‘오일장 첫 우마차 몰고 간날 소싸움’ 5부
2018. 1. 2
 

 김창완 ‘어머니와 고등어’ 노래가 귀청을 아름답게 울려 퍼졌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를 열어보니
한 귀퉁이에 고등어가 소금에 절여져 있네
…어머니 코고는 소리 조그맣게 들리네

어머니는 고등어를 구워주려 하셨나보다
소금에 절여 놓고 편안하게 주무시는구나

나는 내일 아침에는 고등어 구일 먹을 수 있네

어머니는 고등어를 절여 놓고 주무시는구나

나는 내일 아침에는 고등어 구일 먹을 수 있네
나는 참 바보다 엄마만 봐도 봐도 좋은 걸…”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져 이 노래와 가사를 이미지가 아련하게 피어올라 지울 수 없네요. 감히 1950~60년대는 그것은 서민에게는 “그림에 떡이었지?” 그래도 장사하는 아버지 덕분에 중학생 나에게는 호사를 누리고 있었다.

 특히 지난해 가래톳이 나서 걷지 못해 앓아누운 나를 침술사(鍼術師), 흥국 어른이 직접 방문해서 “경희야 돌아누워라” 하셨다. 바지를 내리고 하시는 말씀이 “천장을 쳐다보게나” 하시더니 침으로 ‘탱자’만큼 크게 부어오른 왼쪽 사태살에 침을 놓았을 때 엄청 무서웠다. 생각보다 달리 아주 짧은 순간 그 두려움이 벌벌 떨었지만, 쓸데없는 걱정이었다.

 ‘아이쿠야! 소리를 크게 외치자’ 고름이 천장으로 치솟아 시뻘건 피가 쏟아지자. 거짓말처럼 시원해지는구나? 이제 좀 살겠도다!

 6·25동란은 산골 사람들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가난 불안으로 상처가 아프리카 우간다 미얀마가 따로 없었제?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상처가 곪아 터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기껏해야 침뜸으로 이처럼 치료하는 우리가 현대의술은 구경할 수 없었다.

 하루 만에 자리에서 일어나게 됐다. 오늘따라 우리 마을 명의(名醫) 흥국어른이 찾아뵙고 싶었지만, 하늘나라 가신 지가 내가 60년이 흘렸다. 그때, 침술(鍼術)을 배우고 싶었다만, 그것도 할 수 없어 다만 안타까울 뿐이다.

 아직도 그때 흉터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구나. 요즘 흥국 어른은 전남 장성 구당 김남수翁(옹) 같은 분이 있지요?

 김남수 옹은 한국의 화타(花朶)라고 칭해지기도 하고. 무면허 의료인이라는 한 때 우리나라에서 소외(疎外)을 받았지만, 됐지만. 다행히 독일·프랑스·미국까지 ‘침·뜸’으로 한국 의술(醫術)이 세계인들을 놀라게 하는 분이라 아직도 우리는 “우물안에 개구리다.”

 마치 88올림픽 때에 ‘김덕소 사물놀이’가 세계인들이 칭송하는 한국음악으로 사랑을 받은 것을 우리들의 정부지도자들은 귀중한 문화유산을 발굴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난 “오늘 장날은 ‘장소팔 고춘자가 만담하는 날’이다.” 그들의 재능을 보지 못해 방안에 홀로 누워 마음을 끓이고, 우리 황소가 그렇게 원망스러웠다.

 가끔 재수가 있으면 1950년대에는 시장장날에 가끔 만담(漫談)과 재담(才談)으로 가끔  약장수와 함께 또 찾아오기를 하나님께 기도를 하기로 했다. 시골장터를 웃음바다로 만들어 주었기에 아침 출발부터 가슴이 뛰었다.

 모처럼 장터 구경하며, 혹시 약장사들의 만담과 노래가락을 듣고 배우려고 했던 그 시절, 우리집 큰 일꾼(황소)이 사고를 쳐 좋은 기회를 놓쳐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하고 애통했다.

 

6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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