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영원한 탁구 국가대표 박종열 선수

  • 입력 2018.04.04 21:41
  • 수정 2018.04.04 21:55
  • 기자명 /이오용·배성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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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종열 단장
▲ 박종열 단장

 

 1960~70년대 녹색 테이블을 평정했던 박종열(79)선수, 이제 그는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지만 탁구인생이 끝날 때 까지 많은 사람들로부터 국가대표 선수로 선명하게 불려지고 싶다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합포초등학교(3회) 어린시절 부터 운동신경이 뛰어난 그는 육상, 축구 등 모든 운동에 남다른 감각을 지니고 성장했다. 대부분 사람들은 초등학교~중학교~고등학교로 이어지며 대통령, 의사, 검사, 과학자 등등 장래 희망이 수차례 바뀌는 것이 상례다. 그렇지만 어린 박종열은 나이답지 않게 마산동중학교(4회) 1학년 때 “나는 운동선수가 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내 인생의 목표는 운동선수다. 그렇지만 축구 등 단체경기 선수로는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기 힘들다”는 계산적인 다부진 결론을 내리고 스스로 동중학교 탁구부를 찾아 탁구부원이 되길 자청했다.


 이때부터 시작된 고된 훈련과 경쟁 속에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것이 탁구선수로 인정받기까지 가장 힘든 과정이다. 그렇지만 그는 이미 선택한 길이었기에 오히려 이를 보람으로 생각하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연습에 매진했다.


 특히, 그는 “항상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하지만 좀 더 강한 정신력과 독한 성격이 있었다면 훨씬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자신에게 더 매서운 채칙을 가했다.


 곧 그의 재능은 드러났다. 남들보다 조금 늦게 탁구를 시작했지만 먼저 시작한 친구는 물론, 선배들까지 그의 상대가 못됐다. 그의 재능과 집념은 고등학교 진학하면서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그러나 1955년 마산상고(32회, 현 용마고등학교)에 입학한 그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마산상고는 예나 지금이나 야구가 교구일 정도로 야구에 대한 집착이 강한 학교였기에 탁구부라는 존재는 찾아볼 수 없었다. 박종열 선수에게는 정신이 혼미해질 수밖에 없는 충격 아니겠는가? 이미 탁구국가대표가 되겠다는 목표 의식을 갖고 열정과 집념을 쏟아 부은 그가 아닌가?


 ‘목마른 사람이 샘 판다’는 속담처럼 이때부터 그는 체육선생님, 심지어 교장·교감 선생님을 졸라 탁구부 신설을 간곡하게 요청했다.


 그리고 조건까지 제시했다. “탁구경기가 있는 날은 출석처리를 해 달라. 공부는 더 열심히 하겠다”고 수 개월을 조르고 조른 끝에 마침내 학교장 허락을 받아냈다.


 수락과 함께 뛸 듯 기쁜마음으로 자신이 지도하던 후배를 데리고 강당 한편에 먼지에 뒤덮여 있던 탁구대를 청소하고 본격적인 운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학교예산 한 푼 지원 없는 상황에서 모든 경비는 그의 주머니에서 지출됐다.


 그의 재량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2학년 때인 57년 4월, ‘마산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하면서부터다. 집념 강한 박종열 선수는 학생부는 물론, 일반부까지 모두 석권하는 기염을 토하면서 학교장을 비롯한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더구나 3학년 무렵, 부산에서 개최된 ‘전국탁구선수권대회’에서는 당시 천영석 국가대표선수까지 제패하면서 모교 마산상고는 물론, 경남 전역에 그의 존재감이 알려졌다.

 

▲ 1964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장면.
▲ 1964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장면.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당시 ‘해병체육부대’에서 박종열 선수를 놓치지 않기 위해 혈안이 됐다.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으면 행동부터 달라지는 법, 그렇게 해병대(83기)에 입대한 그의 탁구 실력은 하루가 다르게 두드러졌다.


 ‘제44회 전국체전’에 참가한 해병 박종열 선수는 기라성 같은 국가대표 급 팀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면서 해병의 위상을 드높였다. 이뿐만이 아닌 ‘올라운드 플레이’ 달인으로 지목받고 있는 박 선수가 출전하는 각종 대회 우승은 항상 해병대 몫이었다.


 가슴에 태극마크가 달린 유니폼을 입는 탁구국가대표가 되겠다는 목표 의식을 갖고 달려온 박종열 선수, 그의 열망은 결국 해병시절 이뤄졌다.


 그는 “가슴의 태극기는 찬란한 젊은 날 추억으로 휘날리고 지금 생각하면 굉장히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웠다”며 “태극기를 달고 나라를 대표하면서 내 젊은 시절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 얼마나 멋진 일이었는지 지금도 당시 기쁨의 척도는 헤아릴 수 없다”고 회상했다.


 61년 해병제대와 함께 경남대학교(61학번) 체육특기생으로 입학하며 또 한 번 경남대 신화를 만들었다. 경남대 탁구선수들을 이끌고 ‘제 16회 전국종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박종열 선수 팀은 우승후보로 지목 받던 팀들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남자단체전 우승, 종별 대학부 우승까지 거머쥐며 우승 컵을 경남대에 안겨 탁구 불모지던 경남대 위상을 높여놓았다.

 

▲ 1964년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선발된 박종열 선수
▲ 1964년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선발된 박종열 선수


 마산동중학교 1학년 어린나이 답지 않게 “나는 운동선수가 되겠다”는 확고한 의지를 머릿속에 각인시키며 “내 인생의 목표는 운동이다. 그렇지만 축구 등 단체경기 선수로는 가슴에 태극마크를 달기 힘들다”는 결론으로 탁구를 선택했던 박종열 선수, 그는 대학졸업 후 ‘조선공사’ 실업팀에 스카웃 되면서 64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개최된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 그렇게 꿈에 그리던 태극마크를 달고 대한민국 국가대표 선수로 출전하는 영광을 안게 됐다.


 당시 ‘대한탁구협회’는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를 우리나라에서 개최하기 위해 다각도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유능선수를 선발, 좋은 성과를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협회는 이사회에서 1, 2차 선발전을 통해 선수를 엄선했다.


 이에 따라 1964년 5월 23일과 24일 이틀에 걸쳐 장충체육관에서 1차 대회를 개최, 남녀 일반부. 소년부. 여학생부 등 각 부에서 16명씩을 선발했다.


 이어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3일간 한성여고 체육관에서 최종선발전을 개최하고 선수선발을 완료했다. 선발전을 통해 단체전에 출전할 선수가 확정, 남자일반부는 김충용, ‘박종열’, 최승의, 김지화, 강희경, 박중길이, 여자일반부는 조경자, 진양자, 곽수자, 이신자가, 소년부 김진호, 이강섭, 문용수 , 김박문이, 여학생부 최정숙, 정해옥, 노화자, 민영애 등으로 구성됐다.


 주최국은 각부 16명씩 참가할 수 있었으므로 위 단체전에 출전하는 선수들을 포함해 선수 64명, 임원 14명 등 총 78명 대규모 선수단을 구성, 강훈에 돌입했다. 당시 남녀 일반부는 산업은행 강당에서, 소년. 여학생부는 숙명여고 강당에서 각각 훈련을 가졌다.


 ‘대한탁구협회’는 국내적으로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를 성황리에 치르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했으나 국외적으로는 마찰을 빚는 문제가 발생됐다.


 일본이 전년도 ATTF 총회에서 모욕을 당하고 회의장을 퇴장한 것을 빌미삼아 한국에서 개회하는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언론을 통해 발표한 것이다. 그리고 참가신청 마감을 얼마 남겨놓지 않고 또 자유중국을 ATTF에서 축출하지 않으면 참가하지 않겠다는 엉뚱한 트집을 잡았다.


 당시 조직위원회 입장에서 아시아탁구선수권에 일본과 자유중국이 참가하지 않으면 대회 유치 명분이 서지 않게 된다. 더구나 어렵게 유치한 국제대회가 물거품이 될 위기 상황에서 조직위원회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되자 대회 조직위원회는 유태영 조직위원장을 일본에 급파, 일본이 대회에 참가토록 설득해 다행히 일본은 선수단 21명을 파견시키겠다는 승낙으로 어렵게 ‘제7회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를 치룰 수 있었다.


 이 대회에서 박종열 선수 팀은 일본에 분패했지만 그래도 값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 박종열 선수가 각종 대회를 석권하며 거머쥔 상장들.
▲ 박종열 선수가 각종 대회를 석권하며 거머쥔 상장들.


 연어의 귀소본능(歸巢本能)처럼 박종열 선수가 고향 마산으로 돌아온 것은 79년 말, 한 마디로 그가 소망하던 모든 꿈을 이룬 ‘엘리트체육인’에서 ‘생활체육인’으로 변모되는 시점이었다.


 반면, 또 한 번 새로운 집념이 발발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생활체육인으로 변모된 박종열 선수는 탁구 저변확대를 위해 거금을 투자해 ‘문화탁구장’을 개장하고 후진양성에 정성을 쏟았다.


 지역 중·고등 탁구부 학생들이 경기에 참가해 우승하고 돌아오면 그는 어김없이 격려금과 장학금을 지급했다. 또 꽃집을 운영하면서 형편이 어려운 선수들을 남모르게 돕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35세 이상 여성·40세 이상 남성·80세 미만 탁구인들의 모임인 ‘국제베테랑탁구연맹’을 창설했다. 이 단체는 국적에 관계없이 현역선수에서 퇴임한 탁구인들로 주축이 된 단체다.


 생활체육인으로 변모된 박종열 선수는 ‘국제베테랑탁구연맹’ 회장이면서도 회원들과 각종 대회에 출전하면서 녹슬지 않은 과거 명성을 여실히 드러냈다.


 특히 그는 1997년 11월, 한국탁구동우회가 주최하고 대한탁구협회가 후원하는 ‘회장기 전국대회’를 통해 3, 4, 5, 7. 8, 9, 10, 11, 13, 19회까지 40대부 개인단식 우승과 50대로 넘어가면서도 31, 32, 35, 36까지 무려 14번 개인단식 우승을 기록했다.


 또 1979년 마산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에서 개최된 ‘제1회 국제베테랑탁구대회’는 그의 명성답게 한국, 미국, 홍콩, 일본, 중국 등지 5개국 선수 250여 명이 참가하는 매머드대회로 부상하면서 또 한 번 생활체육 탁구부문의 초석을 다졌다. 이 대회에서 박종열 선수이자 회장은 당연히 개인단식 우승을 차지했다.


 이어 1999년 4월, ‘제7회 영·호남 친선탁구대회’우승, 1999년 10월, ‘제2회 베테랑탁구연맹 친선탁구대회’ 개인단식 우승, 2002년 3월, 경기도 안산에서 개최된 제10회 회장기국민생활체육 전국 탁구대회60대부 개인단식 우승 등 이루 헤아릴수 없는 많은 대회에 회원들과 함께 출전하면서 생활체육 탁구 저변확대에 힘써 왔다.

 

▲ 박종열 단장은 2019년 프랑스에서 개최 될 ‘80대부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출전을 준비 중이다.
▲ 박종열 단장은 2019년 프랑스에서 개최 될 ‘80대부 세계탁구선수권대회’ 출전을 준비 중이다.


 그는 또 탁구인으로 공적이 있다면 ‘영·호남 친선탁구대회’를 창설한 공로를 꼽을 수 있다. 


 1992년 당시 영·호남인 관계는 매끄럽지 못한 물과 기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마음을 나눌 수 있는 화합은 어렵던 시기였다. 항상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던 그는 탁구라는 스포츠를 컨셉으로 영·호남인 화합의 장 마련이라는 아이디어를 곧 실천으로 옮겨 ‘영·호남 친선탁구대회’를 성사 시켰다.


 이제 그는 2019년 프랑스에서 개최 될 ‘80대부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겨냥해 연일 연습에 매진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탁구인의 영광을 한 몸에 누렸던 보답으로 불우 탁구선수들을 위한 장학재단 설립이 소망”이라고 밝혔다. 또 “우리 후배 해병전우들이 사회 곳곳에서 봉사활동으로 해병의 위상을 높이고 있는 것에 대해 항상 찬사를 보낸다. 이에 선배입장에서 그들을 돕기 위해 ‘원로 해병전우회’를 결성, 그들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는 곳은 우리 원로들이 나서서 봉사활동으로 사회에 일익을 보태겠다”며 손가락으로 V자를 그려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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