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용암사 터

옛 모습 어디가고 절터만 휑하니 남았나

  • 입력 2006.05.12 00:00
  • 기자명 이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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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designtimesp=23351>은 용암사(龍巖寺)를 가리켜, “고려 중 무외(無畏)가 거처하던 곳”이라 말하고, 고려시대 박전지(朴全之)가 쓴 ‘영봉산 용암사 중창기(靈鳳山 龍巖寺 重創記)’를 소개하고 있다.
중창기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성모천왕으로부터 “세 개의 암사(巖寺)를 창립하면 삼한(三韓)이 통일되어 전쟁은 저절로 그치게 된다”는 은밀한 부촉을 받고, 선암사(仙巖寺), 운암사(雲巖寺)와 함께 이 절을 지었다는 것이다. 이 중 운암사는 정확한 기록이 없어 어느 절을 말하는지 알 수 없다.

요즘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왕건’에 운암사가 나온다. 노국대장공주(?­1365)에게 아이가 없다가 결혼한지 숱해만에 만삭의 몸이 되었고, 공민왕은 이를 기뻐하여 죄수들을 석방하는 특사를 내리기도 했다.
그녀는 난산으로 인해 불행히도 아이를 낳지 못하고 그만 죽고 말았다. 노국공주가 죽자 왕은 능을 운암사 동쪽에 마련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운암사는 이 절을 말하는 것인지? 혹은 도선국사가 수십년을 살다가 입적한 절이 백운산 옥룡사인데 옥룡사지의 언덕 너머에 운암사가 있다. 도선의 운암사는 아직 불확실하다.

선암사는 전남 승주군 조계산에 있는 대찰이다. 선암사라는 절 이름은 절 서쪽에 높이가 10여장(丈)이나 되고 면이 평평한 큰 바위에서 연유한다. 이 돌에서 옛 선인(仙人)이 바둑을 두었다 하여 선암사(仙巖寺)라 불렀다.용암사지에도 비스듬하게 누운 너럭바위가 있다.
마치 고성 상족암처럼 넓고 평평하고 검은 바위이다. 용암사라는 절 이름은 이 바위에서 연유한 것 같다.
절터를 감싸고 있는 영봉산 산세가 용과 같고 산벼랑에 층층이 쌓인 활석들이 용비늘과 같다. 비스듬하게 누운 넓은 판암의 위쪽 끝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 4호 ‘석조지장보살좌상’이 있고 판암의 아랫쪽 잔디밭에 우리나라 보물 제 372호 ‘용암사지부도’가 있다.

부도에서 대문 쪽을 보자면 계단이 있는 언덕 위에 탑이 있었던 흔적이 있다.
큰 탑신들이 땅 바닥에 대리석을 박은 듯이 흩어져 있다. 용암사지 부도는 원래 파손되어 절터 주변에 늘려 있었던 것인데, 1962년에 새로이 복원했다.
복원당시 부도의 지대석과 중대석 그리고 탑신은 새로이 만든 것으로 교체했다. 원형을 보존하고 있는 8각의 높고 둔중한 하대석에는 각 면마다 보살상이 조각되었다.
조각은 면석을 깊게 파서 감실처럼 꾸미고 대상을 다시 돋을새김으로 묘사했는데, 조각솜씨가 뛰어나고 무척 아름답다.
하대석의 윗면은 지붕모양의 경사를 이루었고 경사면의 아래 끝 부분은 띠를 돌려서 갑석(甲石)모양을 조각해 냈다.

고려시대 용암사는 왕명으로 절을 경영케 할 정도로 크게 번창했다. 1318년에는 80여칸의 당우를 새로 짓고 20여칸을 중수했다.
또 왕명에 따라 대장경을 만들고 부족한 장경을 강화도 판당(板堂)에서 찍어와 무려 600여함의 상자에 넣어 봉안했다고 전한다. 용암사의 폐사연대는 모른다.
그러나 경상남도가 ‘용암사지 부도’를 소개한 안내판에 “고려말까지 존속했다는 이 사찰은 현재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고, 이 부도를 비롯하여 석탑, 석등, 석비 등의 각 부재가 다소 남아 있다.”고 한 것은 매우 무책임하고 모순된 말로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designtimesp=23372>이 1530년(중종25)에 간행됐다. 여기에서도 절이 존속하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가? 절의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고 말하면서 절터 곳곳에 남아 있는 부재들은 또 무엇인가?
용암사지를 더욱 아이러니하게 만든 것은 해주정씨가 세운 ‘장덕재(章德齋)’라는 제각이다.
제각은 부도며 석등 그리고 ‘홍좌국통비’를 뒤쪽 구석에 밀쳐놓고, 소쿠리처럼 움푹 들어간 절터를 가득 채우고 있다.
홍좌국통비의 거북이는 매우 특이한데 목이 끊어진 채로 부지할 수 없는 머리를 돌에 지탱하고 있다.

제각을 자세히 살펴보면 건물 기둥이 절기둥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둥글고 투박한 기둥에는 붉은 색깔의 절 체취가 아직 남아 있다. 또 제각의 축대와 제각으로 오르는 계단은 온통 절 부재들이다.
이러한 부재들로 미루어 보아, 용암사는 고려시대 이후 흥망을 거듭했을지라도, 해주 정씨의 제각이 이 곳으로 옮겨지던 때에, 어떤 형태로든 절이 존속되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해주정씨는 농포 정문부의 후손들이다. 농포는 이괄의 난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죽었다.
그는 생전에 유언을 해 후손들에게 남쪽의 진주 땅으로 내려가서 벼슬을 하지 말고 농사짓고 살으라고 일렀다.
그래서 지금은 진주 진양호 안에 섬이 되어 있는 땅에 가호서원(佳湖書院)을 세우고 터를 잡았다.
그리고 일부는 용암에 터를 잡고 살았다. 그 후 진양호의 댐둑이 높게 조성되면서 서원이며 제실의 모든 것을 용암에다 함께 몰아서 세웠다.

용암에 있는 정씨 재실은 웬만한 궁궐을 보는 것처럼 거창하다.
재실 바로 옆 원용암마을 초입에 정자나무가 하나 있다. 수령이 400년쯤 되는 회화나무이다.
정자나무는 해주정씨 재실과 원불교 용암교당 사이에 있다. 원불교 용암교당은 꽤나 역사가 깊다.
교주인 소태산 대종사의 재세 시에 이미 세워진 교당으로 경남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이 교당은 서부경남 지역의 교두보 역할을 했던 곳이고, 대종사가 영남지역을 교화할 때 이곳에서 유숙하기도 했단다.
원불교 교당을 지나 냇물을 따라 골짜기 안마을로 들어서면 용암본동 마을인데 해주정씨의 집성촌이다.
흙과 돌을 섞어 쌓아올린 담벼락이 고풍스럽다.
담벼락 속의 기와집은 마치 허물어질 듯 쇠락해 있다.
지금 용암리 마을에 불교의 기운은 쇠잔하다. 쇠잔하다 못해 비참하다.

동네에서 소를 많이 키우는지 절 초입부터 풍겨나기 시작한 소똥냄새는 용암사지에 이르러 절정을 이룬다. 용암사지 터에 큰 소외양간이 있다. 외양간 앞에는 외양간에서 나온 질펀한 소똥들.
그러나 고려시대에 용암사의 영화(榮華)는 매우 화려했다.
무상한 영화의 그림자는 ‘용암사터’로 이르는 산길에 상자골이니, 홈골이니, 바랑골이라는 이름으로 너덜너덜 붙어 있을 뿐이다.
상자골은 용암사 절의 상좌스님이 거처했던 암자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상좌가 상자로 바뀌어진 이름이다.
홈골은 영봉산 바위틈에서 나는 물을 홈으로 연결해서 큰절로 대었던 곳이다. 또 바랑골에서는 용암사를 왕래하던 스님들이 자주 쉬어갔다고 한다.이현도기자 yhd@jogan.co.kr


        [여행정보]진주 반성 수목원-용암사 가는길              ▲이반성과 일반성 사이에 있는 반성 수목원에는 지금 수련꽃이 만개했다. 각시 붓꽃은 벌써 지고 있었다. 붉은 색깔의 아카시아 꽃도 피었다.

▲용암사터는 진주시 이반성면 용암리에 있다. 마산~진주간 2번 국도를 따라 간다. 발산 고개를 넘어 평동마을에서 1km 정도 더 가면 오른쪽으로 16번 시도로가 나온다. 이 길을 2.3km 정도 가서 이반성면 소재지인 면소담에 이르는데, 이 곳에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진다. 오른 쪽 길을 조금 가면 용암리 본동이 나오고, 본동 앞의 오른쪽에 있는 마을의 좁은 길을 따라 끝까지 올라가면 용암사터가 나온다. 직진하면 본동마을 고풍스런 돌담들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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