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성 법률칼럼] 피해자다움과 ‘성인지 감수성’

  • 입력 2019.10.14 18:07
  • 기자명 /경남연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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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달 초, 대법원은 자신의 비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에게 징역 3년6개월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수행비서였던 피해자 김지은씨의 미투 폭로가 나온 지 1년 6개월 만의 확정 판결이다.

 이에, 다수 언론이 안 전 지사의 유죄 판결에 대한 핵심 요인으로 ‘성인지 감수성(gender sensitivity)’을 꼽았다.

 이번 칼럼에서는 성인지 감수성의 개념과 이를 둘러싼 오해와 진실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성인지 감수성은 유죄추정의 원칙이다?

 일각에서는 성인지 감수성이 언급된 안 전 지사의 판결을 보고 “무죄추정의 법칙을 무시한 판결이다”는 반응도 나왔다.

 특별한 증거가 많지 않은 것이 성범죄 사건의 특징인데, 오로지 피해자의 진술만을 가지고 유죄를 선고해 무고한 피의자를 만든 게 아니냐는 것.
 사실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이는 성별 불균형에 대한 이해를 갖춰 일상생활 속에서 성차별적 요소를 감지해 내는 민감성을 뜻하며, ‘미투 운동’이 사회 현상으로 불붙었던 지난해 4월 대법원 판결에서 처음 언급됐다. 

 교수 A씨가 성추행을 이유로 해임당하자 해임이 잘못됐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대법원은 “법원은 성희롱 관련 소송의 심리를 할 때 그 사건이 발생한 맥락에서 성차별 문제를 이해하고 양성평등을 실현할 수 있도록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고 명시했다(대법원 2017두74702).

 그러나 이 성인지 감수성은 피해자 말이 다 진실이라고 전제하는 개념이 아니다. ‘의심스러울 때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한다’는 형사 재판의 대원칙 아래,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하기 어려울 때 성인지적 관점을 가지고 피해자가 처한 앞뒤 맥락을 조금 더 세심하게 살펴보자는 의미다.

 증거 없이 감성으로만 판단해 피해자의 주장을 사실로 인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가 처해있는 상황과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경위, 그리고 그 심리과정을 충분히 고려해 사실 여부를 잘 따져보라는 새로운 주문인 것이다.

 ▲‘피해자다움’에 갇혀 성범죄 피해자를 외면하지 말 것

 성인지 감수성이 언급되기 전, 법원은 성폭행 사건 심리 시 ‘사건 이후에도 가해자와 연락을 취한 점’ 등을 이유로 피해자답게 행동하지 않았다며 죄의 성립을 부정하거나, 피해자가 범행 방법이나 구체적인 시간 등 사소한 부분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해자에게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성인지 감수성은 이처럼 성폭행 피해자가 보여야 하는 ‘피해자다움’을 규정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성폭행 사건의 심리에 있어 지향해야 할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친구 아내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30대 남성 사건을 살펴보자. 1심 재판부가 가해자에 무죄를 선고하자, 피해자 부부가 “죽어서 복수하겠다”며 동반자살을 택해 세간에 알려진 사건이다. 

 당시 1심, 2심 재판부는 모텔 주차장 CCTV 영상 속 피해자가 ‘강간 피해자라고 보기에 지나치게 자연스럽다’고 설명하면서 피고인의 강간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이 모든 판결을 뒤집고 사건을 파기환송시켰다. 폭력단체 조직원인 가해자의 폭행, 협박에 시달려왔던 피해자는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없었는데, 원심은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무죄를 선고했다는 것. 대법원은 이를 간과한 원심판결에 ‘성인지 감수성’을 가지고 피해자가 처한 앞뒤 맥락을 다시 살펴보라고 지적했다.

 아직까지 가해자 중심의 인식과 구조에 더 익숙한 우리 사회의 분위기를 고려했을 때, 신분 노출이나 부정적 여론에 의해 피해에게 2차 피해가 가해질 수 있는 점 등을 미루어보면 성폭행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성정이나 관계 및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으므로 피해자의 진술을 쉽게 배척하지 말라는 취지인 것으로 해석된다.

 정리하자면, 성인지 감수성이란 성별 간의 차이에서 오는 불균형을 인지하고 피해자가 처한 상황의 눈높이에서 사건을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는 뜻인 것이다. 

 다만, 아직까지 명확한 개념이 성립되지 않은 만큼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99명의 범죄자를 놓치는 한이 있어도 단 1명의 무고한 사람을 범죄자로 만들지 마라’는 형사법의 대원칙을 숙고하는 태도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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