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마산 고현 바닷가 진기철의 화실

그림 안그리면 하늘이 날 미워할거야

  • 입력 2006.05.17 00:00
  • 기자명 이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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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기철 (66)화백은 화실을 바닷가에 두고 있다. 공룡발자국이 많이 나온다는 고현바다이다. 진화백의 화실을 지나서 동네를 벗어난 곳에도 발자국이 있고, 화실 건너편의 바다 안으로 쑥 빼어 들어온 얕은 산 아래 으슥한 곳에도 주섬주섬 깔려 있다. 발자국이 있는 산비탈에 올라 진화백의 화실 쪽을 건너다보면 바닷가는 목가적이다.

바다는 호수와 같고 늪과 같고 초원과 같다. 정적(靜的)인 바다이다. 동해를 역동적(力動的)이라고 본다면 정적인 남해는 고요하고 적막하다. 적막한 바다를 크고 작은 섬들과 작은 쪽배들이 새까맣게 덮고 있는 것이 남해바다이다.

해안선을 따라 휘어지는 곡선의 굴곡도와 그 굴곡마다 채워져 있는 물상들의 아름다움이 우리나라 남해안만한 데가 있을까? 고현바다에도 소쿠리 같이 깊게 휘어진 해안의 곡선을 따라 빙 돌아가는 길에는 온통 고기잡이 그물들이 늘려져 있다. 또 정박한 배들.

바닷가 동네는 그 자체가 설치미술이다. 산비탈에 앉아 바다를 내려다보면 작은 바다는 한없이 사랑스럽다. 화가는 다방 2층 건물을 화실로 쓰고 있다. 다방은 겉으로 보아 매우 쇠락해 보이지만 현재 성업 중이다. 화실은 다방 옆으로 난 옥외계단을 통해 2층으로 올라가게 되어 있고, 화실에는 선착장 쪽으로 난 큰 통창이 하나 뚫려 있을 뿐 세 벽은 그림들로 꽉 차 있다. 큰 통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바닷바람은 싱싱하다. 싱싱한 바람은 공룡 발자국 산의 산 초록색깔을 짙게 머금고 화실의 창문 속으로 불쑥 밀고 들어온다. 바다색깔은 지금 봄이 지나가는 길목이라 푸른색이 희멀겋게 바래져 간다.

화가는 처음부터 추상화에서 출발했다. 추상 작업 도중에 틈틈이 사실화를 그리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흐름은 추상이다. 그는 색의 질감에 비중을 두고 있다. 칸딘스키가 그의 작품 속에 음악적 리듬을 넣었다면 진기철은 작품 속에 물감이 갖고 있는 색의 농도를 더 빡빡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두고 평론가는 “음악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말을 하는데, 아무래도 화가의 작품 속에는 음악이 흐른다기 보다는 농염한 색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 더 적절한 표현 같다. 그의 초기작품들은 원색적이다. 진주출신 작가 박생광을 생각나게 하는 색깔이다. 색이 강렬하고 딱딱하고 거칠다. 우리나라 사찰의 단청과도 같은 오방색이 더러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은 화면이 많이 부드러워지고 자연스러워졌다는 평이다. 색도 원색 보다는 중간색을 많이 쓰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추상화에 대해 “가령 구상작업에서 새를 그린다면 새의 아름다운 형상을 보이는 대로 그리지만, 나르는 새가 가지고 있는 생명력이나 다른 사물과의 관계 등 새의 형상만으로 표현할 수 없는 형상내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것이 추상작업의 몫”이라고 말한다. 표현할 수 없는 형상내적인 관계란 무엇일까?

초록이 물들어 오는 산들, 날아드는 갈매기, 선착장에 정박한 작은 배들, 어부, 봄이 가고 돌아오는 여름을 기다리며 살을 찌우고 있는 탐스런 꽃들은 화가의 입장에서 실제적인 것이 아니다. 허상이다. 그의 추상화 이론은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色卽是空)’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공(空)은 색(色)이고 색(色)은 공(空)이다. 모든 현상은 공(空)하다. 그러나 그 공이 우리가 인식해야 할 실상이고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이다. 이 세상의 물상을 공과 색, 영원한 것과 무상한 것, 실상과 허상으로 구분한다면 그는 전자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눈에 보이는 물상은 추상화에 필요한 도구는 될지언정 그 개체만으로는 존재가치가 없다. 그래서 그의 추상화에서 사물은 현상적 시각으로는 읽혀지지 않는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하나하나 의미를 지닌 개체로서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개체는 조화와의 관계 속에만 표현된다.
나비를 예를 들어 보자. 진화백의 작품 속에 나비가 자주 등장한다. 나비는 비상, 봄 혹은 사랑 등 나비의 내재적 의미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나비를 보고 무엇인가 의미를 발견하려는 습성이 있다. 그러나 작품 속에서의 나비는 무의미하다.

작품 구도상의 안정성 때문에 등장한 나비로, 추상요소의 한 부분일 뿐이다. 나비의 대칭과 균형이 작품 전체의 체계에서 무의미의 의미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진화백에게서 의식과 무의식의 비중을 말한다면 무의식 쪽으로 무게가 더 쏠린다. 작품 전체에서 무의식이 흐르고 있다. 최근에는 작가가 작품을 의도적으로 구성해 보았지만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한다. 역시 그는 무의식의 화가이고 무의미의 화가이다.

진화백은 1964년 서울대학교 미대 회화과를 졸업했다. 그의 미술전공이 삶과 더불어 일관된 것은 아니다. 학교에 다니면서 대한민국 미술대전에 입선했고, 대학을 졸업하고 3년 뒤에 창작미술협회전에 작품을 낸 후, 마산에 내려오면서 작품 활동이 중단됐다. 대략 15년여의 공백기간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가구업에 손을 대서 사업을 크게 벌였다가 결국에는 가진 재산을 다 털고 본업으로 돌아왔다.

그 후 화가는 1996년에 서울과 마산 창동에서 첫 개인전을 열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알리게 되었다. 그는 사업이 망한 것에 대해 “하늘이 준 재능이 그림인데, 그림 안 그리고 외도했으니까 벌 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현도기자 yhd@jog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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