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삼매(三梅), 그 고고함으로 맞이하는 ‘봄(春)’

절개의 상징으로 선비들의 사랑 받아와
산청 삼매, 세월과 시대 정신 담아 현대에도 교훈 남겨

  • 입력 2020.02.25 15:28
  • 수정 2020.02.25 15:30
  • 기자명 /노종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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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4일 산청군 단성면 남사예담촌에 원정매가 개화해 봄이 오는 것을 알리고 있다.
▲ 지난 24일 산청군 단성면 남사예담촌에 원정매가 개화해 봄이 오는 것을 알리고 있다.

홀로 뜨락을 거닐으니
달이 나를 따라오네  

매화 곁을 몇 바퀴나
돌고 돌았던가  

밤이 깊도록 오래 앉아
일어나기를 잊었더니

옷깃에 향기 배고
그림자는 몸을 가득 채우네

ㅡ퇴계 이황 매화시첩(梅花詩帖) 중

 


 자연은 봄을 우리에게 쉬이 허락하지 않았다. 봄은 시샘하는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2월의 일기, 민족의 영산 지리산에도 봄이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다. 산천(山川)은 여기저기서 봄의 기운을 전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수백 년의 고고함으로 꿋꿋하게 지리산의 이야기를 전하는 산청삼매(三梅)가 봄을 재촉하고 있다.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고 잔설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매화(梅花)는 소나무·대나무와 함께 세한삼우(歲寒三友)라 불리며 예로부터 선비들이 귀하게 여겼다. 매화를 지극히 사랑했던 퇴계선생은 100편에 가까운 매화시를 모아 ‘매화시첩(梅花詩帖)’으로 묶었고 세상을 떠나는 날 아침에도 “매화 화분에 물을 줘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한다. 

 또 매화에 얽힌 일화들은 많다. 남명의 수제자였던 수우당 최영경(1529~1590)이 한강 정구(1543~1620)의 백매원(白梅園)을 방문했을 때 마침 매화가 만발했다. 봄은 중춘이라 복숭아가 만발한 시기였다. 

 수우당은 노복을 불러 도끼를 가져오게 하고 정원에 있는 매화나무를 베어 버리라고 명했다. “매화를 귀하게 여기는 까닭은 백설이 가득한 깊은 골짜기에 처해 절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복숭아꽃과 더불어 봄을 다투니 너의 죄는 참벌해야 마땅할 것이나 사람들의 만류로 그만두니 너는 이후로 마땅히 경계함을 알아야 할 것이다”며 늦게 피어난 매화를 꾸짖은 일화가 있다. 

 이처럼 매화는 예로부터 절개의 상징으로 세상에 물들지 않는 올곧은 선비의 정신에 비유되기도 했다.

 

  원정매(元正梅)

집 양지바른 곳에 일찍 심은 한 그루 매화
찬 겨울 꽃망울 나를 위해 열었네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으니
한 점 티끌도 오는 것이 없어라
-영매(詠梅)(원정공매화 時)

 

 원정매(元正梅)는 수령이 약670년생으로 고려 원정공 하집이 심은 것으로 등걸은 고매(古梅)로서의 품격을 갖추고 있고 3월말이면 연분홍 꽃을 피운다. 원정매 앞에는 자그마한 매화시비(梅花詩碑)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로 선정된 산청군 남사마을, 여러 집들 속에서 매화집이라는 문패가 걸려 있는 집. 이곳은 진양 하 씨가 32대째 살고 있는 집이다. 열두 대문의 고래 등 같은 기와집은 없어졌지만 석파 노인(대원군) 낙관이 뚜렷한 원정구려(元正舊廬) 현판이 이집의 권위를 대변하는 듯 걸려있다.

 진양 하 씨 대동보에는 ‘1377년 이후 원정공은 송악에 몇 칸의 집을 짓고 송헌(松軒)이라 호를 지었으며 일찍이 매화 한그루를 심었다’고 기록 돼 있었다. 원정공의 매화 사랑을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분양고가(汾陽古家)는 동학란 때 소실되고 지금 있는 집은 31대손 하철이 지은 집이다.

 집터 담장 옆에는 원정공의 손자 문효공 하연이 심은 감나무가 있다. 이제 원정매는 긴 여정을 내려놓고 밑둥치에서 싹을 틔운 자손에게 대를 잇게 했다.

 

 정당매(政堂梅)

한 기운이 돌고 돌아 다시 돌아오나니
천심을 섣달 전의 매화에서 볼 수 있네
스스로 큰 솥에 국 맛을 조화하는 열매가
부질없이 산중에서 떨어졌다 열렸다 하네.
-단속사견매(斷俗寺見梅).(동문선 권22)

 

 산청군 단성면 입석마을에서 청계호수로 넘어가는 길목에 천년고찰이었던 단속사의 절터가 있다. 오래전 임진왜란 후 외구의 재침입인 정유재란 때 불이나 폐허된 터에는 삼층석탑 2기를 덩그러니 세우고 수많은 얘기를 풀어낸다. 아쉬워하며 돌아서는 발걸음을 멈춰 세우는 것은 금당자리였던 뒤쪽에 마른 등걸 의지해 가지를 키운 정당매(政堂梅)다.

 정당매(政堂梅)는 조선초기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기록으로 입으로 회자되고 있다. 정당매(政堂梅)는 수령이 약640년생으로 통정 강회백(1357~1402)이 어린 시절 단속사에 심었다는 매화나무로 꽃을 색깔은 백색이며 홑꽃이다. 정당매는 경상남도의 도목(고유번호 12-41호)으로서 보호수로 지정돼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0권 단속사 편에서 정당매(政堂梅)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통정 강회백(1357~1402)이 절에서 글을 읽으면서 매화 한그루를 손수 심었다. 그 뒤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렀으므로 그 매화나무를 정당매라 했다’. 1487년 지리산 유람 길에 나선 추강 남효온(1454~1492)은 단속사 뜰의 매화를 보고 통정이 손수 심은 정당매를 떠 올렸고 1489년 지리산 등정에 나선 탁영 김일손(1464~1498)도 단속사의 정경을 소상히 기록하면서 정당매(政堂梅)를 언급했다.

 강통정의 증손자 용휴는 정당매(政堂梅) 시문을 모은 시첩을 만들어 책의 서문을 김일손에게 부탁했는데 김일손은 ‘정당매시문후’라는 글을 지었다. 그 글에는 ‘매화나무가 자라기 시작한 것은 백년이 넘었고 처음 심은 사람은 단속사에서 공부하던 여말선초의 문신인 통정 강회백이다. 그러나 그 나무는 백여 년을 넘게 살다가 죽고 말았다. 통정의 증손자 강용휴가 1487년에 옮겨 심은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다’고 기록돼 있었다.

 통정의 손자 인재 강희안(1417~1465)이 쓴 ‘양화소록’에도 ‘승려들이 매년 북을 주고 잘 길러 가지와 줄기가 구불구불하고 또한 이끼가 덮여있다. 그 밑에 아직 죽지 않은 한 자 남짓한 낡은 등걸이 있는데 참으로 영남의 귀중한 고물(古物)이다’고 정당매(政堂梅)에 대해 기록돼 있었다. 이 기록에 의하면 강회백이 심은 매화는 이미 죽고 증손자 용휴가 아버지 희맹의 명을 받들어 근처에 매화를 다시 심은 것이라고 한다.

 

 남명매(南明梅)

한해 저물어 홀로 서 있기 어려운데
새벽부터 날 샐 때까지 눈이 내렸구나.
선비 집 오래도록 매우 외롭고 가난했는데
네가 돌아와서 다시 조촐하게 되었구나.
-설매(雪梅) (남명집) 

 

 남명매(南明梅)는 수령이 약450년생으로 산천재 뜰에 남명 조식선생이 61세이던 명동 16년(1561년)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로 3월말이면 연한 분홍빛이 도는 반겹 꽃이 가득히 핀다. 남명조식(1501~1572)선생이 만년의 장수 처로 삼았던 산천재(山天齋) 마당에는 세상 사람들이 남명매(南明梅)라 부르는 매화나무가 있다.

 1561년 선생이 산천재(山天齋)에 터를 잡을 때 심은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매화를 보고 지은 시 두 편이 전한다. 선생은 하늘 한 모퉁이를 떠받치고 어엿이 서있는 천왕봉을 사랑했고 자신의 삶 또한 그러하기를 원하셨다. 천왕봉의 눈이 녹고 덕천 강물이 봄소식을 풀어낼 때쯤 남명매(南明梅)는 꽃망울을 연다. 선생은 “우리선조는 창산 사람, 9대동안 평장사가 났다”고 가계를 밝혔다.   

 이렇듯 산청의 삼매(三梅)는 봄맞이를 나서는 사람들이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대중적인 매화가 아니다. 한없는 세월동안 시대와 시대, 그 시대속의 인물과 그들의 삶과 정신을 이어온 매개체이자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고매(古梅)인 것이다.

 오랜 세월을 봄이면 꽃망울을 터뜨려 사람들에게 봄소식을 전하는 산청삼매(三梅), 인고의 세월의 흔적들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는 산청 삼매(三賣)와 더불어 요즘 코로나19로 근심이 쌓인 국민들과 청정골 산청군에도 따뜻한 봄기운이 충만해 만사가 형통하길 기원하는 것이 산청삼매(三梅)의 바램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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