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보) 무엇이 변해야 산다는 것인가

  • 입력 2020.04.19 12:04
  • 기자명 /경남연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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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긍정과 부정이 날카롭게 부딪칠 때 소박한 합리성을 갖춰야함에도 필요 없는 감정의 포퓰리즘에 젖어 변화를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변화라는 새로운 자유의 길을 스스로 가지 못하고 두려운 나머지 언제나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리고 마는 것이다. 누구는 잘도 변해가고 또 다른 현실에 적응 속도가 빠른데, 왜 나만이 보편적 합리성을 찾지 못하고 태생적으로 주저앉고 마는 가를 생각하면 늘 불안해지고 남과의 경쟁에서 포기하고 마는 것을 스스로 이길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그 용기가 바로 변화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매 시간마다 갈등과 자학적 비관주의에 빠진 채 남과의 투쟁에만 몰두한다면 건전한 자기 주장은 결코 만들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제에 도전하기위해서는 자기 자신에게 엄격해야 됨은 물론이다. 무엇보다 ‘뜨거운 사회’와 ‘차가운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변화의 모습은 언제나 목표가 있을 때만 뜨거운 사회를 진행할 수 있는 공간이 넓어지는 것이다.

 목표를 상실한 변화는 힘을 잃어버린 채 의욕으로만 끝나버리는 허수아비로 둔갑한다.

 적어도 변화에 대한 긍정과 끝없는 의욕을 상실했다면 오늘 가진 나의 자세(姿勢)는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다.

 직장을 안가고 놀고만 있으면 근원적 자유의 길이 열릴 것이라고 보겠지만 무엇인가 변할 수 없는 직업적 소용돌이 속에 있다면 미래의 의욕은 이미 상실된 것이다.

 그래서 서울대학교 김난도 교수는 ‘트렌드 코리아2020’이란 책에서 “가면 뒤에 숨어 있는 현대인들의 진짜 욕망을 찾아 나서지 않으면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가 어렵다”고 이미 밝힌바 있다.

 특화해야만 살아남는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이고 괜찮은 것은 이미 외면당한지 오래다.

 오로지 신데렐라 한 사람에게만 꼭 맞는 유리구두처럼 한 사람의 취향에 맞게 변화할 수 밖에 없다.

 이제는 집단적이고 획일적인 투박한 일상의 변화는 특화 생존을 위해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현미경처럼 산재해 있는 다른 사람의 취향을 찾는데 동심원을 그리지 않으면 이제는 살아남을 수가 없다.

 누구에게나 헤아릴 수 없는 숨은 재능이 무궁하게 있는 것이다.

 여기서 ‘숨은’ 재능이란 능력이 있다는 말이다. 변화를 추진할 수 있는 감춰진 잠재력을 말한다.

 이처럼 숨겨진 재능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기 스스로가 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가져야한다. 흥미, 집중력, 반복, 연상 등을 종합하면 스스로가 해결할 수 있는 변화의 순간을 맞게 된다.

 변한다는 것은 새로운 삶의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고 목표를 달성하는 용기를 갖는 것이다.

 변한다는 것은 거창한 나라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 가는 일상의 동심원 속에서 작고 새로운 ‘의미’를 찾는 작업이 바로 변화의 시발점인 것이다.

 무엇보다 억센 현실을 만났을 때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는 용기가 있다면 결코 두려운 현실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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