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수락석출(水落石出)

  • 입력 2020.08.03 16:29
  • 기자명 /노종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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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종욱 기자.
▲ 노종욱 기자.

 수락석출(水落石出), ‘물이 빠져 밑바닥의 돌이 드러난다’는 뜻으로 물가(物價)의 겨울 경치(景致)를 일컫는 말이기도 하고, 나중에 ‘사건(事件)의 진상(眞相)이 명백(明白)하게 드러남의 비유’하는 말로 쓰이기도 한다.

 ‘강물이 수량이 줄어 물이 빠지면(水落) 당연히 밑바닥의 돌이 드러난다(石出)’, 이 성어가 오랫동안 유명해진 데에는 송(宋)나라 제1의 시인으로 꼽는 소동파(蘇東坡)의 명구에서 유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지은 적벽부(赤壁賦)의 ‘후적벽부’에 이 말이 나오는데 처음 이 말을 썼을 때에는 ‘겨울 강의 물가 경치’를 표현한 말이었으나 ‘점차 어떤 사건의 진상이 명백하게 드러나는’을 비유하게 됐다. 

 진실은 언젠가는 꼭 드러난다.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진실이란 녀석은 어떤 현상이나 삶들로 통해서 꼭 드러나기 마련이다. 진실을 숨기려고 발버둥 쳐도 결국 진실은 드러나는 것이다.

 치부(恥部)를 드러내는 것은 누구나 힘들다. 또한 자기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더 힘들다. 드러내고 인정하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고 진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드러내고 인정하는 것에 더 많은 박수를 보내고 격려를 보낸다. 하지만 아무도 모를 거라는 착각 속에서 사람들은 어리석은 판단과 선택을 한다.

 산청군은 예로부터 충절의 고장이자 선비의 고장이다. 자고로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에게는 목숨을 바쳐 그 의(義)로움을 증명했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의로움을 감추고 주위나 후배들에게 모든 불의(不義)를 전가하고 있다. 그들의 공통점은 지난 세월의 삶이 결코 의롭지 않을지언데 독야청청(獨也靑靑) 자신들만의 의로움을 여기저기 스스로 떠벌이고 있다.

 보통사람들은 자신의 의로운 일들은 겸손의 미덕으로 타인에게 알려지기 꺼려한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후배들의 공(功)은 가로채고 과(過)는 미루려하는 후안무치(厚顔無恥)한 일들을 하기도 한다. 지난 5월 산청군은 경남도 정기 감사에서 부적절한 근평 조작으로 인한 지적상황으로 당시 실무자들은 징계위원회에 회부돼 중징계를 비롯해 다수의 직원들이 불이익을 당했다.

 하지만 당시 평가를 주도했고 책임자의 위치에 있던 이들은 그 책임을 후배들에게 장렬하게 미룬 탓으로 그 불평 부당함이 인정받아 어떤 이는 징계라고도 할 수 없는 부끄러운 ‘훈계’를 받았다고 알려졌다. 훈계를 받은 어떤 이는 후배들이 평가하는 존경하는 선배 공무원으로 수차례 선정됐다고 한다. 가히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다른 어떤 이는 자신도 왜 그렇게 근평 조작됐는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부하 직원들은 상사의 지시나 결재 없이 임의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한다.

 특히 근무평정은 더욱이 그러하다. 자칫 이러한 일들은 형사사건으로 발전될 수 있기에 더욱 그러하다. 심신미약(心身微弱) 상태이거나 정신이 나간 직원이 아니라면 그리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 책임을 지는 위치에 있던 자들은 부하 직원들의 그런 행태를 알 수도 없었고 이해가 되지 않는단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안다. 넓게는 ‘위계에 의한 공문서 위조 및 동행사’라 볼 수 있고 좁게는 실무자들의 업무미숙으로 인한 ‘단순 실수’라 여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수차례에 걸쳐 이뤄지는 검증과정마다, 매번 또 매년 실무자들이 실수를 했을까? 참으로 비겁하고 비열하다.

 자기 자신이 너무 소중한 이유일까? 자신이 소중하면 앞으로 한창 인생을 살아나가야 할 후배들의 미래도 중요한 것이다. 그들은 후배들을 비롯한 타인들은 어찌 되든지 나만 아니면 된다는 파이팅이 넘쳐나는 모습과 조직을 사랑했다는 그들의 행태에 존경심(?)마저 생겨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다. 개구리 올챙이 시절을 생각지 못한다. 기자의 기억에는 ‘훈계’를 훈장처럼 여기는 이가 선배들의 옳지 않는 행태를 통렬히 비판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코로나로 인해 전국이 비상시국(非常時局)이다. 후반기 대 유행을 예상하는 시기에 후배들이나 지역사회에 전해지는 희망적이고 훈훈한 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욕심일까?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려운 일이 와도 견뎌내고, 꿈을 이뤄낼 수 있는 힘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일까?

 답은 간단하다. 그저 평범하고 순조롭게, 탐욕적이지 않는 사람들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보다 더 힘든 상황에 처하지 않았음을 감사하는 것이다. 그러면 용기를 얻게 된다.

 ‘잘 산다’는 것은 부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부자는 재물이 많은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잘 산다’는 것은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관계가 좋게 살아가는 것이다.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며 소통하고 배려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자기만 잘살면 된다는 비겁하고 이기적인 사람은 결국 모두에게 외면 받기 마련이다.

 살다 보면 ‘뿔’ 달린 사람도 만나게 되고 ‘가시’ 돋친 사람도 만나게 된다. 또 비겁한 사람도 만나게 되고 야비한 만나게 된다.
 

 그러나 실망하지 말자. 그냥 그러려니 푸념만 하고 살아가자. 세상에는 비겁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꽃처럼 고운 사람만 만나고 싶지만 어디 꽃 같은 사람만 만날 수가 있나.

 그런 사람을 만나거든 상처 받지 말고 그러려니 하고 넘겨 버리려고 하니 사람인지라 후배들은 마음이 상한다. 박수를 받으며 떠나는 모습은 아름다운 것이다. 떠날 때를 아는 것도 현명한 것이다. 발버둥은 추하게 후배들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질 것이다.

 이제 불편해 하지 말고 내가 꽃으로 살아가면 된다. 희망이 없어도 실망하지 말고 절망하는 것보다는 희망을 얘기하는 것이 났다. ‘추함’은 그들의 몫이고 ‘당당함’은 남은 자들의 몫이기에….

 대부분이 원칙이고 미덕이라 생각하는 관행들이 그들에게는 ‘욕심’으로 ‘버팀’으로 여겨지나 보다.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은 인간성의 좋음이나 특별함이 아니다. 그저 분수를 알고 떠날 때를 알고 주위의 불편함을 알기 때문이다.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다. 여기서 진보의 의미는 ‘사람’이라고 규정짓고 싶다. 사람에 대한 따뜻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당대의 행위는 역사가 평가하는 것이다. 그리운 사람으로 기억되거나 잊혀진 사람으로 여겨지거나…. “대체 뭣이 중한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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