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모] 장한라 시인 ‘사과 박스’

  • 입력 2021.01.18 15:36
  • 기자명 /정리 한송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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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박스’


이래봬도 가끔 뉴스에 출연하지. 경력이 어언 삼십여 년, 이제 방송 타는 것은 죽기보다 싫다. 한때는 내 등에서 밥 먹고 공부하던 애들이 용솟음치고 올라 덩달아 귀한 몸으로 대접받았지.

포장이사라는 게 생기기 전까지 꽤 잘나가던 시절이었어. 용달차에 모셔져 새집 가는 기분이란. 나의 봄날의 끝은 뇌물이 나타나고부터지. 그 괴물이 나를 섭외할 때 단호히 안 된다고 할 걸 후회돼. 돈 냄새 배인 꼴로 기자들 앞에 찍힐 때, 창피해서 목매고 싶은 심정이었지.

풀죽은 나를 어쩌다 찾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다행이야. 반겨줌에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시 내 세상이 온 것 같아. 바닥에 짓밟힌 나를 일으켜 손수레 태워 줄 때는 감격 그 자체야. 종일 다녀서 겨우 라면 몇 그릇 신세일지라도 비에 젖지 않는다면 하루하루 지낼 만해.

삐딱한 세상 화딱지 나는 날은 손오공 주문이라도 외치고 싶지만 외롭고 배고픈 이들에게 요술단지 같은 화수분이 되어서 정말 나답게 살고 싶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 내가 담고 열어 보이는 세상은.

 

 ◆시작노트
 전봇대에 기대어 있다. 칼바람에 뒹굴던 박스가 수북이 눈을 덮고서.
 중국 수출길이 막히면서 폐지가격도 반토막 났다. 국내 폐지 생태계가 부디 안정화되기를 기대한다.

 ◆장한라 시인 약력
 부산 출생, 제주 거주
 2007년 ‘지리산 문학’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즐거운 선택’, ‘새벽을 사랑한다면’, ‘딴지를 걸고 싶은 고백’ 외
 계간 ‘시와편견’ 편집장, 도서출판 시와실천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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