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세평]산촌(山村) 일기

  • 입력 2006.06.01 00:00
  • 기자명 강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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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촌에서는 비 오는 날이 좋다. 너울져 날아오르는 산새는 깃을 접고, 빗방울들이 무리지어 골짜기를 휘돌아 난다. 무거운 물이 작은 입자가 되어 바람을 닮는다. 바람의 등을 타고 산 어귀에서부터 산봉우리까지 가벼이 날아오른다. 누가 비를 무겁다고만 하고, 땅으로 떨어진다고만 할 건가. 바위 골짜기를 적시고, 나뭇잎을 적시고, 낡은 초가를 적시고, 비는 작은 골을 한바퀴 휘- 돌고는 메마른 하늘에다 어머니 다림질하실 때처럼 푸우-, 물을 뿜어 올린다. 지구의 중심을 향해 끝없이 내리기만 하는 무거운 것이 작은 물의 입자로 흩어져 가벼운 것으로 되새의 군무처럼 날아오르는 것을.

물은 그 반짝이는 되비침의 속성으로 거울이 되고 창은 나를 이끌어 그 앞에 세운다. 다른 공간에 있는, 다른 나를 찾아 마음은 어느덧 비 무리처럼 유리창 너머의 세계로 날아간다. 보일 듯 말 듯 안개의 입자는 그 투명의 마성으로 나를 의식과 무의식의 그 경계에까지 가 닿게 한다. 비는 속내를 내비치게 하여 깊은 샘과 놋의 거울 속에 잠겨 있는 희미한 기억을 불러낸다. 오래 전에 떠난 친구, 더 서러워할 것도 없는 사랑, 멀리 날아가 버린 솔개연, 잃어버린 일기장….

빗방울은 나뭇잎을 간질이며 목말라 바삭 쇠잔해지는 모든 것에 가만히 차오르는 숨결을 되살려준다. 뒤틀어진 가지를 곧추 세워 올리고, 시들어진 꽃잎을 살아 있게 하고, 나뭇가지를 땅에 내려 그 뿌리로 물을 끌어올리게 한다. 비는 어둠과 친연(親緣)하여 자고 나면 모든 것을 살아 있게 하고, 생명을 주고, 아무도 모르게 모든 것에 퇴색해 낡아 있는 빛깔을 되찾아준다. 비는 밤사이 온갖 것에 제 색깔과 제 모습을 되살려주고, 아침이면 씻어내린 투명의 하늘 어디론가 풀어져 날아간다.

비를 맞으면 나도 나무 푸른 줄기처럼 내 색깔과 아련한 그리움을 되살릴 수 있을까. 나도 두 팔을 활짝 벌리고 온 낯짝에 비를 맞으면 산다고 지나온 모진 세월, 온몸에 난 생채기와 희미해져가는 산다는 것의 꿈을 되살릴 수 있을까. 더러는 스스로를 해치기도 하고 더러는 타인으로부터 받은 아픔을, 하나도 남김없이 씻을 수 있을까.

똑, 똑, 똑.
홈통을 타고 내리는 빗물이 밤사이 꿈에 들어와서 소리하며 흐르며 나를 깨운다. 돌 틈으로 종알거리며, 숭얼거리는 작은 내의 노래로 ‘물처럼 흐르며 사는 법’을 노래한다. 가만히 가슴을 토닥이며 아픔을 달래주던 어머니의 노래로, 어렴풋이 기억 속에, 푸른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잠겨 있던 오랜 어머니의 노래로 노래한다. 아픈 생채기를 다독이며 더 큰 비 묻은 산의 숨결 속에서 가지를 접은 작은 나무같이 깊-은 꿈 속에서, 비는 아픔을 적시고 작은 숨결로 노래한다. 그 가는 곳이 어디일지라도 비는 노래하며 흐른다.

밤사이 산촌의 비는 날개를 펼치고 골을 나르며, 작은 소리로 노래도 하고, 먼 산이 가까이 다가와 앞산 어깨 너머에 서 있는 아침이 오면, 푸우- 안개를 뿜어올린다.

세상 일 잊고 돌아앉아서 사는, 산촌에서 비 오는 날, 창 앞에 붙어서면 그래도 애잔한 슬픔이 있다. 비에 젖은 채 노루 한 마리가 문 밖에서 머리를 기웃거리고 있다. 삽살이가 짖어댄다. 비에 젖은 꽃잎, 비에 젖은 나뭇잎, 비에 젖은 노루, 비에 젖은 풍경 속에 나도 하나의 풍경이 된다. 나를 바라보는 시선에 물기가 서린다. 되비친 물의 거울에 나의 모습을 본다.

산촌에서 비를 맞는 일은 한 마리 작은 짐승이 되는 일이며, 한 그루 키 작은 나무가 되는 일이다. 마음이 바람을 타고 하늘을 나는 작은 빗방울이 되는 일이다.

명형대/경남대학교 국어교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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