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데스크]멧돼지의 계절

  • 입력 2006.06.06 00:00
  • 기자명 이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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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음이 짙다. 유월이 되면서 산은 하루하루가 달라진다. 산을 덮은 녹음이 산의 속살로까지 쑥쑥 스며든다. 산이 살을 찌우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까? 나무와 나무 사이로 공허하게 뚫렸던 산 속이 크고 작은 나무 이파리들로 콱콱 막히면서 점점 밀밀해지고 있다.

눈에 보이는 공간만 밀밀해지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땅 속에도 서로 엉키어진 나무뿌리들이 포동포동 제 살을 찌우고 있다. 습기로 젖어 있는 땅도 부들부들해서 웬만한 풀뿌리들은 큰 힘 안 들이고도 쑥쑥 뽑혀진다.

산이 풍성해지면 산짐승들이 좋아한다. 노루며 고라니, 토끼와 같은 초식동물들에게는 온 국토가 잘 차려진 밥상이다. 아침에 일어나 음식으로 가득 찬 산을 바라보는 산짐승들의 마음은 얼마나 뿌듯할까? 그 산이 눈앞에만 펼쳐진 것이 아니라 멀리서도 첩첩이 밀려오고 있다면 포만한 행복감을 그들은 어떻게 표현할까.

풍성한 산은 새들에게도 즐겁다. 찍어 먹을 벌레들이 많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지저귀는 새 울음소리가 다르다. 이때는 ‘울음소리’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다. 노래한다는 표현이 맞다. 조잘대며 ‘노래하는’ 새소리는 경쾌하다.

밀림의 왕을 사자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산짐승들의 왕은 뭐니뭐니 해도 멧돼지다. 덩치로 보나 그 떼거리로 보나 멧돼지만한 산짐승이 없다. 요즘에는 멧돼지가 자주 출현한다. 지금은 칡뿌리에 살이 붙고 대밭의 죽순이 땅 밖으로 쑥쑥 솟아오르는 철이다. 칡과 죽순은 멧돼지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중의 하나이다. 멧돼지가 제철을 만났다. 멧돼지에게 가장 바쁜 철이 아닌가 생각된다. 바쁜 철로는 밤이 익어 툭툭 떨어지는 가을철이 있긴 하지만, 그 바쁜 철의 시작이 지금부터인 셈이다. 유월 죽순이 나면서부터 가을에 밤이 떨어질 때까지가 멧돼지의 농번기다.

멧돼지는 보통 어미돼지를 중심으로 새끼들과 함께 예닐곱 마리씩 떼를 지어 다니며 칡을 켜고 죽순을 잘라먹는다. 그런데 멧돼지가 칡 파먹고 죽순 파먹는 것까지는 좋다. 밤수확 철에 덤벼대는 멧돼지가 문제다. 밤농사가 농민들의 큰 수확원 중의 하나인데, 이놈들은 농민들이 밤을 따기도 전에 먼저 접수를 하는 통에 농민들의 적이 되고 있다.

송이 밭도 이미 그들에게 접수됐다. 솔밭에 있는 지렁이를 잡아먹기 위해 멧돼지는 긴 코를 땅에 묻고 쟁기로 밭갈 듯이 송이밭을 아예 파 엎어 버린다. 멧돼지가 현대판의 산적이 되어 산천을 누비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 산적들로부터 피해를 막아낼 수 있을까. 농촌에는 지금 멧돼지를 쫓는데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동원되고 있다. 멧돼지에게 인기척을 내기 위해 밤밭에다 밤새도록 라디오를 켜놓기도 하고, 사람 머리카락을 봉지에 싸서 나뭇가지에 걸어 놓기도 한다. 머리카락을 쓰는 이유는 냄새맡는 성능으로 말하자면 멧돼지의 코가 개 코에 비해 30배나 되기 때문에 사람 머리카락 냄새에 돼지란 놈이 인기척을 느끼고 도망갈 것이라는 계산에서이다.

머리카락을 달아 놓기가 머쓱한 사람들은 빨간 크레졸 병을 밤나무에 달아놓기도 한다. 크레졸 냄새가 멧돼지를 쫓아낼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요즘에는 하얀 스티로폼이 유행하고 있다. 멧돼지가 나타날 만한 곳에 넓은 스티로폼을 걸어놓는다. 넓고 하얀 스티로폼은 밤이 되면 멧돼지에게 위협적이다. 게다가 바람이 불면 스티로폼은 나뭇가지를 두드리며 퉁퉁 소리까지 낸다.

여름이 되면 산이 풍요로워서 산짐승들에게는 낙원이지만 농민들에게는 새로운 전쟁이 되고 있다. 멧돼지의 공격을 막으면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더 좋은 아이디어는 없을까?

이현도/탐사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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