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길 칼럼]보리밥 찬가 엊그제 같은데…

승인2009.09.22l수정2009.09.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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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핏하면 흉년이 들었던 40년 전만해도 풍년은 모든 사람들의 가장 큰 소망이었다. 수리시설이 부족한 시절 풍년은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되지 않았다. 풍년이 들기 위해서는 제때 비가 내려야 하고 8~9월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태풍을 잘 넘겨야 했다. 그리고 병충해도 잘 막아야 가능했다.

그러다 보니 풍년이 드는 해는 온 나라가 들썩 거렸다. 초등학교마다 운동회가 열리고 장구와 꽹과리·북을 치고 풍년을 축하하는 행사가 잇따라 열렸다. 라디오에서는 연일 첫뉴스로 보도하고 신문에는 연일 대문짝만한 풍년 기사로 넘쳐났다. 한마디로 풍년은 농촌과 도시 할 것 없이 큰 기쁨이었다.

어려웠던 시절 쌀은 식량 이상의 큰 의미가 있었다. 지금이야 쌀이 남아 야단인 세상 한 두 해 흉년이 든다고 큰 문제 될 것이 없겠지만 1970년대 초 까지만 해도 한해 만 흉년이 들어도 도시와 농촌 할 것 없이 엄청난 고통이었다. 물가는 연일 치솟아 민심은 어수선했다. 마을마다 밥 굶는 사람이 수두룩했다. 그 판국에 몰지각한 상인들은 남이야 굶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고 닥치는 대로 쌀을 사쟀다. 가뜩이나 쌀이 모자라 난리인 판에 사재기까지 벌어졌으니 서민들이 살림살이는 그야말로 비참했다.

턱 없이 쌀이 모자라 쌀값이 치솟자 정부는 보리밥 찬가를 부르며 잡곡밥을 먹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학교에서는 점심시간에 도시락을 검사하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학생들은 ‘보리밥 먹으면 신체가 건강해진다’는 글짓기를 하고 그림도 그렸다. 식당에서는 쌀밥을 팔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제했다. 지금은 흔하고 흔한 것이 쌀이라 젊은 세대들에게는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이 그랬다.

이처럼 신성시 되던 쌀이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략 한 것은 81년부터 올해까지 내리 28년째 풍년에다 국민들의 식생활의 변화다. 밥을 해먹지 않으니 쌀 재고량은 말 그대로 눈덩이다. 한해 쌀 생산량의 20~ 30%가 정부와 농협 창고에 쌓인 채 말라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쌀이 흔하다 보니 풍년이 들었는지 흉년이 들었는지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없다. 3~4만원 하는 쌀 한말이면 네 식구가 한 달은 먹고사는데 그럴 수밖에.

풍년을 가장 기뻐해야 할 농민들조차도 풍년이 왔는데도 무덤덤하다. 한마디로 농사가 잘 되면 뭐 하나 가마니 수가 늘어나는 것만큼 쌀값이 떨어질 것인데 풍년이 왔다고 그리 기뻐 할 일도 아니라는 것이다.

정부도 농민들의 심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정부 곳간에 쌓인 묵은 쌀 수십만t을 처리하지 못해 머리를 싸맬 판인데 또 풍년이 들어 대량의 쌀을 매입해야 할 처지에 놓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해서라도 쌀값이 안정되면 다행이겠지만 가을걷이가 끝나고 나면 쌀 값 하락은 불을 보듯 하기 때문이다.

풍년 농사의 여파는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당장은 산지의 쌀값을 끌어 내렸다. 농민들은 한 여름 땡볕에 흘린 땀방울만큼이나 풍성해야 가을이 걱정스럽다며 쌀값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높인다. 농민들은 최소 생산비용인 쌀 한 가마당 21만원 보장, 올해 수확분의 전량을 정부가 수매하라고 촉구하고 나섰다.

문제는 밀물처럼 터져 나오는 농민들의 한숨소리를 정부로서도 해결할 뾰족한 묘안이 없다는 것이다. 재정도 재정이지만 정부 창고마다 재고가 쌓여 터져 나가고 더 들여 놓을 자리도 없으니 말이다.

이처럼 정부와 농민들을 힘들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생활수준의 향상으로 곡물과 과일·육류뿐 아니라 엄청나게 쏟아지는 가공식품으로 배를 채우면서 밥그릇이 크게 작아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국민 1인당 연간 쌀 소비량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1999년 96.9kg 이었으나 매년 감소해 올해는 74.3kg으로 앞으로 2~3년 내에 70kg 밑으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처럼 국민들의 식생활 변화는 앞으로 쌀 소비가 더 줄었으면 줄었지 더 늘어 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정부가 쌀값이 떨어질 때 마다 시중 물량을 사들이고 공공비축미 몇 만 섬을 당초 계획보다 더 매입 한다고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다. 이 같은 방법으로 돌파구를 찾기에는 우리사회에 매년 남아도는 쌀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오는 풍년을 막을 수도 없고 벼를 안심을 수도 없는 일. 그렇다고 지구촌 곳곳에 먹을 것이 없어 굶어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마당에 가축의 먹이로는 사용할 수는 없다.

늘어나는 재고량을 줄이기 위해선 어떤 방식으로든 밀가루가 차지하고 있는 영역을 쌀이 일정부분 빼앗아 와야 한다. 아침밥 챙겨먹기, 무의탁 노인 결식아동 지원과 같은 소극적인 구호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지금 시중에 유통되는 쌀 가공식품으로는 소비에 한계가 있다. 이제는 정부가 나서 쌀 소비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한 차원 높은 식품 개발을 서두를 때다. 그래야 농민도 살고 나라도 산다.

쌀 재고는 농민들만의 문제,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쌀 재고의 심각성을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쌀 소비에 적극 동참해야 한다. 지금 우리 농업은 나라 안팎으로 매우 어렵다.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직시하고 걱정하지 않으면 우리농업의 미래는 없다. 농업이 황폐화 되면 삶의 풍요로움도 없다. 풍년을 걱정해야 하고 보리쌀이 쌀값보다 비싼 세상, 그 풍요로움의 이면에는 힘들어 하는 농민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편집국장장병길  abz3800@gn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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