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월드컵 에너지

  • 입력 2006.06.20 00:00
  • 기자명 이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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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중(虛空中)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主人)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 심중(心中)에 남아 있는 말 한 마디는 / 끝끝내 마저 하지 못하였였구나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시 ‘초혼(招魂)’의 일부다. 초혼은 혼을 불러들인다는 뜻이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낼 수 있다는 간절한 소망에서 하는 의식을 ‘초혼’이라고 한다.

초혼의식은 사람이 죽은 직후 그가 생시에 입던 저고리를 왼손에 들고 지붕이나 마당에서 목숨이 건너간 방향인 북쪽을 향해 죽은 이의 이름을 세 번 간절하게 부르는 행위이다.

육체에서 영혼이 이탈해 떠나가는 것을 죽음으로 간주한 우리나라 사람들은 목숨이 끊어진 순간에 이미 떠나가고 있는 혼을 다시 불러 오기만 한다면 목숨을 부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초혼은 사람의 목숨을 건지는 일이므로 어설프게 해서는 안 된다. 온 정성을 쏟아 지극하게 혼을 불러야 한다. 김소월 시의 ‘초혼’에는 방금 막 숨을 거둔 애인을 두고 간절하게 혼을 부르는 모습이 여실히 드러나 있다.

어렸을 때의 일이다. 외삼촌은 일곱 명의 누이들과 함께 성장한 삼대독자였다. 외삼촌에 대한 외할머니의 정성이 얼마나 컸겠나. 그런데 무슨 병인지는 모르지만 그가 병에 걸려 ‘딸깍’하고 막 숨을 거두는 순간이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외할머니는 죽은 외삼촌을 내려다보다 말고 벌떡 일어나더니 옷걸이에 걸린 저고리를 손에 들고 맨발로 문을 열고 뛰어나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지붕 위에 올라 “명수야! 명수야! 명수야!”하고 세 번 외쳐댔다.

이윽고 외삼촌은 살아났다. 외할머니의 초혼의식 때문에 살아난 것이다. 그것 말고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있었고, 간절한 초혼의 외침이 있었기 때문에 외삼촌과 외할머니 사이에 강한 염파가 일어나 목숨을 건졌다고 믿었다.

나는 염파를 믿는다. 산골에서 성장한 탓에 이를 믿을 만한 일들을 이래저래 많이 경험했다. 염파는 사람의 성향이나 종교관에 따라 강도차이가 있겠지만 지극한 믿음이 강한 염파를 형성한다고 본다.

월드컵 열기 때문에 우리나라는 지금 열광의 도가니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월드컵 말고는 중요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TV 속에서나 TV 밖에서나 붉은 옷 색깔과 굉음의 응원가로 온 국토가 뜨겁다.

국가대표팀이 프랑스와 극적인 무승부를 기록한 19일 새벽은 주민들의 함성소리에 내가 사는 아파트가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들썩거렸다. 꼭두새벽인데도 어찌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잠도 자지 않고 TV를 보고 있는 것인지? 그건 그렇다 치고 선수가 뛰고 있는 독일 경기장도 아닌데, 창원 광주 서울 등의 도시 광장이나 운동장에 모여 스크린을 보며 응원하는 거리응원단의 투지(?)를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을까. 이날 프랑스 전에서 박지성 선수가 동점골을 넣는 순간 나는 염파를 생각했다. 강렬한 집단염파가 독일의 경기장에 작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한 골을 얻어맞고 ‘설마 우리에게 또다시 행운이 있겠나?’하고 실망했는데, 마술처럼 공을 막아내는 이운재의 재주라든가,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내는 박지성의 스릴을 보면서 ‘아! 염파 에너지다’고 생각했다.

물론 일차적으로 선수들이 선전한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이와함께 경기를 하는 선수들과 응원하는 국민들 사이에 솟아난 집단염파가 크게 작용했다. 좀 우스운 생각이지만 이 정도의 에너지라면 16강은 물론이고 4강 신화도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온 국민이 좀 더 강하고 집중적으로 염력을 모은다면 말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축구뿐이겠는가. 채널을 바꾸어서 염파를 축구외의 다른 목적의 에너지로 사용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다. 이것이 우리의 귀중한 자산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맞다. 붉은 물결의 월드컵 에너지가 중동에서 생산되는 석유 못지않은 값진 보물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에너지로 기름값 걱정 안해도 될 세상이 올는지도 모른다. 환상일까?

이현도/문화특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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