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밭위에 식사]예스터 데이②

  • 입력 2006.07.05 00:00
  • 기자명 권경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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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먹어.”

톰 라더 부인이 어머니처럼 말한다.

“부인께서는 안 드세요?”

고기를 질겅질겅 씹으며 박준호가 묻는다. 만약 두 사람뿐이었다면, “페티라고 하랬잖아?” 금세 다그쳤으리라 생각하며 박준호가 빙그레 미소 짓자,

“왜 웃어? 왜 웃냐구?”

다이애너가 괜한 심술을 부린다.

“방학이니까.”

박준호가 말한다.

“여름방학은 즐거워.”

하네코에게서 걸려온 전화벨이 울린 것은 바로 그때다. 톰 라더 부인이 수화기를 건네 주며,
“동급생이란다, 받아.”

하네코와의 전화는 어제 학교 앞에서 주고받은 약속이다.

그러니까 그녀가 약속을 지킨 셈이다. 그녀 집으로의 초대 때문이다. 한데 하네코의 목소리가 밝지 않다.

“왜 그래?”

박준호가 묻는다.

“우리 스페인 가는 여름 여행 취소됐어.”

하네코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한다.

“왜 취소된 거야?”

놀란 척하며 박준호가 되묻는다.

“아빠가 약속을 깨뜨렸어.”

“아빠가 깨뜨렸다구? 하긴… 본래, 아버지들은 바쁘니까.”

“여행뿐 아니야. 오늘 밤 로얄 엘버트 홀 공연도 아빠가 펑크를 낸 거야. 너도 알지? 타크 뎃의 정기 콘서트 말이야. 그 입장권 구하느라 엄마가 새벽부터 나가 줄을 서서 간신히 구했는데, 아빠가 오늘 아침 스케줄을 바꿔 버린 거야.”

하네코가 너무 일방적으로 혼자 얘기하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이,
“참, 너 전화기 한참 붙들고 있어도 괜찮니?”라고 묻는다.

“괜찮아.”

박준호가 말한다.

“너한테 하소연하려는 데도?”

“괜찮아.”

“나 우리 아빠 욕하고 싶어.”

“그래. 뭐든지 맘껏 해도 괜찮아.”

박준호는 전화인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너, 우리 아빠 한 번도 못 봤지?”

“응, 못 봤어.”

“우리 아빤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사실은 오늘부터 아빠도 휴가거든. 스페인 여행은 내 방학에 맞춰 우리 가족이 지난 1월부터 짜 놓은 스케줄이야. 한데 그걸 아침에 눈 떠서 전화 한 통화 받고 어긋 내 버린 거 있지? 동경에서 중요한 손님이 영국 관광을 온다니까 앞뒤 볼 것 없이 휴가를 취소하고 사적으로 그 손님을 안내하겠다는 거야. 대사관에서 아무 요청도 안 했는데 말이야. 그게 말이 되는 소리니?”

하네코는 흥분 상태다.

“글쎄…… 어른들 생각은 우리하고 딴판이니까.”

“우리 엄마도 어른이지만 아빠완 달라. 아침부터 물 한 모금 안 드셨어.”

“너네 엄마도 상심하신 모양이구나.”

“상심한 정도가 아냐. 아빠하고 내내 입씨름을 벌였는데 아빠는 처세를 잘해야 출세하는 법이라고 우기고, 엄만 1년에 한 번쯤 가정을 생각하고 지키는 것도 처세라고 당당히 맞섰어.

내가 보기에도 아빠가 밀리는 거 같았어. 하지만 아빠는 절대로 승복하지 않았어. 아주 비굴하게시리 “성난 목소리로 당신이 뭘 안다구 그래? 난 가정보다 일본이 더 중요해! 알았어. 이 멍청아!” 하고는 문을 쾅 소리 나게 닫고 나가 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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