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마당]주부일기(主夫日記)

  • 입력 2006.07.12 00:00
  • 기자명 강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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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을 펼쳐봐도 주부(主婦)만 있고 주부(主夫)는 없다. 그러나 집안살림을 도맡아 내조(內助)에 전념하는 남성들도 의외로 많고 차츰 더 늘고 있다는 소식이다.

신문사에 비정규직(비상임)으로 종사하는 필자도 일찌감치 정규직에 종사하는 집사람 아니 바깥사람한테 가장이라는 감투를 넘겨 버리고 주부(主夫)가 된 지 오래다.

와이프가 출근하는 대로 집안을 대충 정리해 놓고선 따라 집을 나선다. 혼자 사시는 모친에게 문안도 할 겸 아침밥을 얻어먹기 위해서다. 나갈 때 물통이며 반찬그릇 몇 개를 빠뜨리지 않는다. 모친집에 달려 있는 정수기에서 물도 받아와야 하고 반찬도 몇 가지 얻어와야 가장(?)이 돌아왔을 때 저녁 밥상이 그런 대로 마련되기 때문이다.

낮엔 가급적 집엔 들어가지 않는다. 동네 아줌마들 시선도 그러하고 들어앉아 있어봐야 뾰족한 수가 없기 때문이다. 밖에 나돌아 다녀야 점심먹자는 사람도 만나고 운이 좋으면 술자리도 얻어 걸치게 된다. 다행히 필자에게는 거의 비워두다시피 하는 무슨 문화동우회 사무실이 있어 내 전용 사무실로 쓰고 있으니 백수치고는 운이 좋은 편이다.

주부(主夫)의 휴대전화에는 곧잘 세일 안내 메시지가 날라온다. 단골 마트마다 고객카드가 내 이름으로 되어 있다 보니 세일 안내가 날라오는 것이다. ‘우중이라 10%가 더 적립된다’느니
‘선착순 몇명 30%까지’라며 꼬드기지만 벌써 중고참인 주부(主夫)의 마음을 흔들지 못한다. 차라리 저녁 늦게 가면 으레 30% 세일쯤 쉽게 찾을 수 있는 데다 재래시장엘 가면 두 배 가까이 싸게 떨이로 살 수 있다. 그것도 대단히 고마워 한다.

막간을 이용해 서울서 자취하는 아들녀석에게 메시지를 보낸다. ‘오늘쯤 세탁기 한번 돌려라. 방청소도 좀 하고.’ 한참 있다 답신이 온다. 청소에 대한 답은 없고 ‘오늘 아르바이트 월급 받아 기분 짱. 아빠 내려가서 한턱 쏠게.’ 애들 좋아하는 개그를 다시 보냈다. ‘어쭈구리 쭈와쭈와.(좋아좋아)’

갑자기 수박을 사라는 확성기 소리가 골목에 울려 퍼진다. “달고 시원한 수박이 무조건 5000원, 8000원. 아지매 수박사러 오이소.” 계속 반복된다. “달고 시원한 수박이 5000원, 8000원. 아지매 수박사러 오이소.”

넨장, 아저씨가 사러가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는가. 말끝마다 아지매만 찾는다. 저 놈의 수박장수만 세상 바뀐 줄 모르고 있다. 이 시간에 집어 들어앉아 있을 아지매가 몇이나 될 거라고.

직장에 간 아지매, 돈 벌러 간 아지매, 골프 연습하러 간 아지매, 몰려 찜질방에 간 아지매, 미장원에 가 앉았을 아지매…….

오후가 되면 아저씨들은 더 별 볼일 없어진다. 오라는 데도 없고 갈 데는 더 더욱 마땅찮다. 그러니 헐렁한 사무실마다 화투짝이나 훌라판으로 심심풀이를 펼치지 않으면 가게 앞에 앉아 술판을 벌이기 십상이다. 이러니 차라리 주부라는 직업을 갖는 편이 훨씬 낫다. 아들녀석에게도 설거지 연습을 시킬 생각이다.

요즘 어느 며느리가 신랑한테 밥 해다 바치겠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똑똑한 며느리가 집안에 들어박혀 살아갈 세상이 아니다. 서로 보완해 주지 않으면 가정이란 것도 꾸려나가기 힘들게 된 세상이 아닌가. ‘가부장(家父長)’이란 말이 사라지고 ‘주부(主夫)’라는 말이 사전에 생겨나야 하는 세상이다.

이런 시시껄렁한 일상을 신문지상에다 까발리는 이유는 이제 막 직장에서 은퇴하는 후배들에게, 곧 백수신세가 될 후진들에게 또 다른 직업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함이다. 가사노동도 법적으로 인정받는 데다 마음먹기에 따라 훨씬 더 알차게 지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가사에 종사하다 보면 다른 일들과 맞물려 ‘바쁘다’ 소리가 절로 나게 마련이다.

명함도 한 장 파기 바란다. 이름 앞에 당당히 ‘전업주부’라고.

한석우/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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