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산책]해인사와 비로자나데이

  • 입력 2006.07.18 00:00
  • 기자명 이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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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동쪽의 알프스 산자락에 ‘상갈렌(St. Gallen)’이라는 고도(古都)가 있다. 인구 7만5000명의 고색창연한 이 도시는 오늘날 스위스 상갈렌 칸톤의 수도일 뿐 아니라 동스위스 경제의 중심지이다. 상갈렌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무엇보다도 10만권 가량의 고서와 2000권의 희귀 필사본을 소장하고 있는 수도원도서관(Stiftsbibliothek)이다. 희귀 필사본들의 대부분은 중세 초기와 중세 전성기에 수도승들에 의해 필사된 것들이다. 이른바 15∼16세기 ‘상갈렌’의 르네상스를 통해 유럽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던 원천이었다.

법보사찰 해인사 장경각에 보존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은 13세기 당시 20여년 동안의 조성작업 후에 이루어진 작품들이다. 그리고 팔만대장경이 해인사에 이운된 해는 여러 정황으로 보아 1302년으로 보고 있다.

이 시기가 강화도와 해인사 등지에서 한국의 인쇄출판 작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진 시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상갈렌 르네상스보다 2∼3세기 정도 시대적으로 앞서 있다.

대장경을 만든 고려사람들은 불법(佛法)의 적극적인 유포를 위해 필사하는 것보다 많은 책을 만들 수 있는 목판을 생각해냈고, 이러한 생각이 고려대장경의 조성이라는 불사(佛事)에 이른 것이다. 이를테면 상갈렌의 책들은 책 한권 한권을 일일이 필사해서 만들어냈고, 그래서 만들어진 책이 희귀한 것인데 비해, 우리 대장경은 한 번 조성된 목판으로 수십 권 내지 수백 권의 책을 만들 수 있도록 했고 세세토록 같은 판본을 인쇄할 수 있도록 배려됐다.

해인사 장경각이 더욱 더 자랑스러운 것은 상갈렌의 수도원도서관이 오늘날 몇몇 관리인을 통해 관광객이나 맞고 있는 과거의 도서관이라면, 해인사 장경각은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수행승의 기도와 수도 속에서 외호(外護)되고 있으며, 스님의 설법이나 역경작업을 통해 생생하게 생동하는 문화의 원천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해인사는 부처님의 말씀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는 곳이라 하여 법보사찰이라고 한다. 법보의 법(法)은 부처님의 말씀을 의미한다. 법보사찰이란 불보사찰 통도사, 승보사찰 송광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 중의 하나이다. 법으로써 우리나라에서 가장 보배로운 절이라는 이야기이다.

오는 29일은 해인사에서 ‘비로자나데이’라는 이름으로 축제를 한다. 비로자나데이는 지난해 해인사에서 발견된 쌍둥이 비로자나불상이 현존하는 불상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정된 후 이를 알리고 축하하고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이다.

비로자나불은 법신불(法身佛)의 다른 말이다. 법신이란 빛깔이나 형상이 없는 우주의 진리 자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불교적 입장에서 보면 빛깔이나 형상이 없는 부처님 말씀이고 부처님 말씀을 모아 놓은 팔만대장경이다. 그래서 법신불이 법보종찰인 해인사의 주인이라는 데에서 해인사가 ‘비로자나데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벌이는 행사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행사의 내용에 대해 시비를 걸고 싶다. 행사의 내용을 보면 퓨전국악, 이색적인 월드뮤직 콘서트 등 절에서 벌이는 ‘가무’이다. 해인사에서 벌이는 가무가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는 행사라고 한다면 나무랄 이유가 없지만, 해인사가 이를 통해 세속화하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에게 해인사가 좋은 이유는 비세속적인 요소때문이다. 시대의 변화라는 템포가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먼저 세속화되어버린 내가 이미 잃어버렸고 다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을 해인사는 아직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늘 그리워하는 고향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도시화와 함께 개발되어버린 지금의 그 고향이 아니다. 나의 유년과 함께 때묻지 않은 이미지로 남아 있는 그 고향이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기억 속의 그 고향이 그리운 것이다.

법보종찰 해인사가 많은 사람들이 그리워 하는 고향의 이미지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쏜화살과 같은 시대의 변화를 막을 수는 없는 일이지만, 해인사에서는 그 템포가 거북이 걸음처럼 느렸으면 좋겠다.

이현도/문화특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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