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시론]그래도 돌아가는 나라

  • 입력 2006.08.04 00:00
  • 기자명 강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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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캐스퍼 와인버거라는 국방장관을 많은 사람들은 기억할 것이다. 올봄에 고인이 된 그는 하버드법대를 졸업하고 명망있는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닉슨 대통령 시절 백악관에 입성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역대 미국의 최장수 국방장관 중 한명이기도 한 그는 2조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군비가 소요된 스타워즈로 불리는 전략방위계획을 추진하면서 당시 국제정치학계에서 주목받고 있던 ‘상호의존론’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옛 소련과의 힘의 우위에서 한치의 양보도 없이 밀어붙였다.

그런 그가 돌연히 사임을 발표하였다. 그의 사임이유는 다름 아닌 아내의 건강이 악화되어 그녀를 돌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그렇게 지극히 사적인 이유로 사임하는 고위공직자는 전 세계를 통틀어서도 드물겠지만 우리나라는 거의 없는 것 같다.

고위공직자들의 인사청문회 제도가 도입되면서 우리는 듣고 싶지 않는 수많은 말들을 듣고 있다. 인사청문회가 고위공직자의 정치적 소신이나 정책보다는 기본적인 도덕성 문제를 검증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재산형성 과정이나 본인 또는 자녀의 병역 문제, 이중국적 문제나 학교입학 문제, 과거 전력, 심지어 주민등록에 관한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도덕성에 문제가 없는 고위공직자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다. 유난히 우리나라 사람들은 권력욕이 강해서일까. 그런데 대부분의 고위공직자는 문제가 있어도 여론이 잠잠할 때까지 버티는 특징도 있다.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최악의 상황이 오면 그때서야 사임을 한다. 그래서 수일에서 수십일내에 단명하는 장관급 인사를 수없이 보아왔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이 있느냐가 아니라 필부들은 털어도 먼지가 나오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뿐인가. 장관직의 사임시에도 뒤끝이 깨끗해 보이지 않는다.

서유럽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제도와 법규들이 매우 세밀하고 집행력도 강하기 때문에 관료들의 권한과 집행력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를 빗대어 ‘관료공화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는 법조인공화국이나 연예인공화국 정도가 어울릴 것 같다. 그동안 검찰은 수사권이나 기소독점주의를 내세워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비쳐진 것이 사실이다. 검·경간 수사권독립 문제로 한참 힘겨루기를 하더니 요즘은 잠잠해졌다. 검찰은 일사분란한 조직문화를 강요하고 우리에게 폭탄주라는 문화를 선사하기도 했다. 사법연수원 기수문화는 법조인들을 한 가족으로 만들면서 거대한 ‘법조인공화국’을 형성하는 고리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우리는 되풀이 되는 대형 법조브로커 사건이나 대형 비리사건이 터지지 않으면 판·검사나 변호사, 경찰간부 등은 모두 깨끗한 사람들이라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법원은 또 어떤가. 자기 식구가 연루되면 검찰과 힘겨루기를 하고 다른 사건의 영장(令狀) 발부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수십년 전부터 풍문으로 나돌던 유전무죄란 말도 이제는 허언이 아닌 듯 싶다. 우리나라의 화이트칼라범죄나 부정부패 문제가 가면 갈수록 더 심각해지는 양면에는 그것을 제대로 단죄하지 못하는 사법부가 큰 일조를 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TV도 그렇다. TV는 국민들의 정신건강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는 매체다. 그런데 가장 좋은 시청 시간대에는 어김없이 수많은 연예인들이 등장하는 오락성 프로그램이나 연속극이 방영된다. 그리고 연예인들의 얼굴과 말솜씨, 진부한 내용 이외에는 별다른 볼거리가 없다. 최고의 시청 시간대에 시사 프로그램이나 공익성 프로그램이 방영되는 선진국과는 딴판이다. 그러다 보니 듣고 알면 유익한 프로그램은 국민들의 눈과 귀가 닫힌 취침시간대로 밀려난다. 그 결과 TV는 수많은 연예인을 양산한다. 그들이 국민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이제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나라는 흡사 ‘연예인공화국’처럼 보인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주소다. 가장 모범이 돼야 할 최고의 정치집단과 고위공직자, 국가권력기관이 제 역할을 못하는 불신받는 나라가 어찌 미래가 있는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래도 한국이 이만큼 돌아가는 걸 보면 참으로 신기해”라는 희망과 체념이 뒤섞인 말이 오늘도 머릿속을 맴돌고 있다.

이동재/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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