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봉 칼럼] 외교통상부는 있는데 외교관은 없다

승인2012.07.02l수정2012.07.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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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는 국가와 국가 간의 전초전이나 다름없다. 외교관은 국가기관의 첨병이며 그들에 의해 국가의 흥망성쇠가 엇갈린 경우가 허다하다. 책사나 모사, 간자 등 염탐꾼이라고 천시하는 봉건시대에도 한 명의 책사 즉 현재로 치면 외교관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낸 경우가 역사서 곳곳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중국과 일본과 러시아 및 한국은 표리의 관계로 얽힌 숙명적인 나라들이다. 이처럼 물고 당기고 먹고 먹히는 4강전에서의 승패는 탁월한 외교적 능력에 의해 결판이 나고 말았다.

동양 3국 중 1842년 남경조약 체결에 따라 중국이 가장 먼저 개국되었고 1854년 미국의 페리제독에 의해 일본이 화친조약이라는 명분하에 개방되었을 때 조선은 신미양요를 거치면서도 쇄국을 종용했다. 동양 4국 중 외교관인 모사나 책사를 가장 많이 활용한 국가는 일본이었으며 후일 그 결과는 동양을 제패하고 미국과 러시아와 균등한 관계를 유지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몽골을 통합한 칭기즈칸이나 몽고를 원나라로 개칭해 사실상 몽고제국을 세계의 중심권으로 도약시킨 쿠빌라이 칸은 문호를 개방해 마르코 폴로 등 외국인들에게까지 관직을 주고 타국의 정보를 최대한 활용했다. 일본 역시 동가숙서가식하는 국민성답게 1860년대에 네덜란드(和蘭)와 친교를 맺어 네덜란드의 정치 문화 경제 전반에 이르는 난학(蘭學)붐에 상승해 군함을 주문하고 서양의 법률과 외교술을 연구하는 13명의 인재를 선발해 유학생을 보냈다.

그 중에는 근대 일본 외교의 창시지로 추앙받는 에노모토 다테아키(1836-1908)라는 젊은이가 포함되어 있었다. 네덜란드에서 해상 국제 법을 주로 연구한 그는 귀국 후 막부의 해군부사령관에 기용되었고 명치유신 이후에도 그의 재능을 아낀 정부군의 실력자 구로다와 후쿠자와에 의해 구명돼 1874년 1월 해군중장 겸 초대 러시아 특명전권대사로 그해 6월 페테르부르그에 부임했다.
당시 한일 간의 교역을 보면 조선은 주로 놋그릇이나 금속활자 및 동전제조에 필요한 구리 등 비철금속을 사들였고 일본은 15세기 중반부터 문익점과 정천익 선생에 의해 중국에서 몰래 들여온 목화씨앗과 목화재배에 적당한 기후에 힘입어 조선에서 목화가 대대적으로 생산되자 1476년경에는 무려 3만7000필의 광목을 수입하는 등 무역불균형을 면치 못했다.

에노모토는 이점을 착안해 일본 토질에 맞는 아마를 러시아공관의 텃밭에 심어 성장과정을 면밀히 기록으로 작성해 씨앗과 함께 몰래 본국으로 보냈고 아마재배에 적당한 일본 토질과 기후는 몇 년 뒤 대량의 아마생산체제를 갖추고 국민과 군인들의 의복재료를 예전의 목면에서 아마로 바꾸어 절대적 열세에 있는 무역역조를 단숨에 뒤집고 말았다.
그 뿐만이 아니라 에노모토는 러시아의 감춰진 보고인 시베리아를 직접 횡단해 현지의 풍속, 지리, 광물자원, 군부대 위치를 상세하게 관찰한 뒤 65일 만에 돌아와 이 기록을 본국으로 보냈고 일본조정은 러시아공포증을 덜고 군비증강을 서둘러 20년 뒤에는 노일전쟁의 승자가 되어 동북아의 맹주로 자리 잡았다.

일본은 외교에 있어 전 국민이 외교관이다. 2차 대전 패전 뒤 한 영국 기자는 침략군인 미군들이 부인네들까지 스스로 노리개로 자원해 미군들을 침략군에서 친일파로 순식간에 둔갑시키는 것을 보고 “미군들은 아침에는 일본인을 모두 죽일 것처럼 진격했으나 점심때는 탄띠를 풀었으며 저녁에는 파티차림으로 일본여성들의 품에 안겨 있었다”라고 타전했다.

조선 500년 동안 조정이 일본에 대해 아는 것은 ‘신숙주 선생’이 성종의 명에 따라 조선과 일본 간의 사절교환의 연혁과 응접 의례 및 사신들의 일본 견문기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1471년에 편찬한 <해동 제국기:海東 諸國記>가 유일한 일본에 관한 정보였고 조선이 아는 것은 해적의 소굴인 대마도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외교부재나 빈곤을 여실히 보여준 사례다.

이명박 정부가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기 위한 방책으로 한미일 군사조약을 체결하고 특히 일본과 군사 분야의 상호 정보를 공유한다는 일방적 발상은 국민감정도 문제지만 과거사의 사례를 볼 때 일본은 결코 마음을 터놓고 상대할 수 있는 친구가 될 수 없다는 사실만은 꼭 유념해야 할 것이다. 쇠고기 협상이 주된 FTA 협상타결도 왠지 찝찝한데 일본과의 군사정보공유 협정은 국회나 국민적 합의를 도출한 후에 해도 늦지 않다. 대한민국에 외교통상부는 있는데 에노모토 같은 외교관은 없을 것 같다는 우려 때문이다.

/수석논설위원경남연합일보  abz3800@gny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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