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 환경문제의 대안인가

정윤 / 환경운동가

  • 입력 2006.04.19 00:00
  • 기자명 이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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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4일이면 새만금 방조제 33㎞ 구간 중 갑문 420m만 남기고 모두 막히게 된다.
새만금 갯벌의 본격적인 죽음이 시작되는 것이다.
3년 전 이맘 때다. 수경 스님과 문규현 신부가 삼보일배를 하였다.

2003년 3월 28일 변산 해창갯벌을 출발한 삼보일배 행렬은 서울까지 300여㎞를 길 위에 참회와 연민의 경(經)을 써갔다.
삼보일배는 가장 낮은 자세로 땅에 엎드려 자연과 하나 되는 것이다. 소리도 내지 못하고 보이지도 않는 생명들에게 한 번 절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다시는 생명을 함부로 하지 않겠다고 결의하는 것이다.

공사를 강행하는 거대한 정부조직과 자본과 과학기술에 대항하는 방법치고는 거대하지도 과학적이지도 않았다. 새만금 갯벌에서 10여 년이 넘게 벌어지는 소리없는 총성과 떼죽음을 막기에는 너무나 비과학적이고 감성적이었다.

난개발로 환경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는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새만금도 천성산도 모두 과학기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한다.

환경파괴의 주범인 과학기술로 환경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획일화된 ppm의 잣대는 과학기술에 면죄부만을 씌워줄 뿐이다.
희석시켜 배출하면 해결한 것으로 간주하는 ‘배출허용기준치’는 속임수일 뿐이다.
더군다나 경제여건에 따라 들쭉날쭉하는 기준치는 과학적이지도 않다.
사람들은 ‘법대로’를 좋아한다. 정부는 ‘법대로’ 새만금 물막이 공사를 재개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법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법(法’)이란 ‘물(水)이 흘러가는(去)’ 규칙이다.
‘법대로’ 한다는 것은 자연의 법칙대로,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반적인 이치대로 한다는 뜻이다.
여론을 무시하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고, 더군다나 아직까지 용도조차 결정되지 않은 공사를 재개하라는 판결은 납득할 수 없다.

4월 21일은 ‘과학의 날’이다. 공교롭게도 다음날인 22일은 ‘지구의 날’이다. 두 날이 달아 있는 것은 과학기술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가 아닐까.
지구환경을 걱정하는 과학자들의 모임은 이미 오래 전에 ‘우리 공동의 미래’라는 보고서를 통해 앞으로 닥칠 암울한 미래에 대해 경고하였다.

지구온난화와 해수면 상승, 식량과 자원의 부족, 기상이변, 물 부족 ……
환경문제는 생태질서로 해결해야 한다. 생태계의 산물인 생명은 생태계 안에서 가장 건강하다.
자연은 유기체다. 우리 몸과 같아서 한 곳이 병들면 다른 곳의 기능도 떨어진다.
한방에서는 막힌 곳은 뚫어주고 곪은 곳은 터트리라 하였다. 반대로, 우리 몸은 자연과 같아서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라는 것이다.

살기 좋은 지구환경을 되살리는 길은 과학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가장 낮게 몸을 엎드려 자연과 하나되는 삼보일배가 아닐까.
우리가 땅에서 떨어져선 살 수 없다는 숙명적 조건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자세가 아닐까. 정윤 / 환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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