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봉 칼럼] 할복이 면죄부가 될 수 있나?

  • 입력 2012.08.10 00:00
  • 기자명 경남연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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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자신의 존재가 우주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뜻한다. 자살이건 타살이건 생명이 끊어진다는 데는 같은 맥락이지만 자의에 의한 자살과 타인에 의해 강제로 목숨을 빼앗기는 데는 큰 차이가 난다. 세계에서 자살률이 가장 높은 나라는 수치스럽게도 대한민국이라고 한다. 올림픽에서의 메달이라면 모를까 ‘자살 금메달’은 사절이다.

나라를 빼앗기자 울분을 참지 못하고 할복(割腹)한 민영환 공이나 단식으로 맞선 최익현 선생 같은 우국지사들, 인성(人性)개발이 아닌 시험인간만을 사육(飼育)하는 교육정책 때문에 고층 아파트에서 투신하는 국가의 동량인 청소년들, 경제난으로 목숨을 끊는 영세사업자나 중소기업인들, 진실과 정의를 알릴 수 있는 통로가 막히자 죽음으로 맞서는 외로운 사람들을 제외하고 자살에 대해 국민들은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그런데도 한국인의 자살률이 OECD 국가 중 최고라는 것은 그만큼 미래에 대한 기대치가 하락하고 있다는 증거다. 자살이라면 과거에는 단연 일본인들이 앞섰다. 내우외환에 부닥치면 국가건 상전이건 팽개치고 자기 살기에만 급급한 조선인들과 달리 일본인들의 할복자살 즉 ‘가이샤쿠(介錯)’에는 그나마 무사도라는 ‘죽음의 미학’을 엿볼 수 있다.
일본인들은 대의명분과 죽음을 하나로 연결 짓는 담대한 교육을 어려서부터 익힌다. 가미가제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2차 대전 패망 뒤 패전의 책임을 통감하고 할복한 일본 정계나 군부 및 일반인들의 숫자가 500명을 넘었다. 을사늑약이나 경술국치 뒤 할복한 조선인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요즈음 국정을 책임지는 정치인들 중에도 자신들의 범법행위를 에둘러 변명하다 못해 할복하겠다는 분들과 무죄를 주장하는 분들이 더러 있다. 그런데도 그 결연한 의지들이 별로 국민들의 가슴에 와 닿지 않는 것이 문제다. 중앙이건 지방이건 막장정치판이나 막장정치꾼들에 대한 국민들의 혐오감은 그 수위가 역대 최고치로 ‘이 뿌리 깊은 부정’에 대해 뭐 묻은 개 뭐 묻은 개 나무란다는 야유소리만 높다.

베르테르(werther effect)효과라고 하여 사회지도층인 명문거족이나 유명 연예인과 지식인의 자살은 당사자의 목숨을 마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감수성이 예민한 국민들이나 청소년들을 집단자살로 유인하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설국(雪國)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와바다 야스나리’의 수제자였던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자살했을 때도 그를 따라 자살한 문학도나 청소년들이 줄을 이었고, 1903년 명문 도쿄 제일 고등학교 학생인 18세의 앳된 미남 소년 미사오(藤村操)가 ‘인생을 알 수가 없다?’라는 의미의 불가해(不可解)라는 화두 같은 유서 한 장을 남기고 닛코의 화엄폭포에 몸을 던져 자살 했을 때 베르테르 효과에 심취한 일본의 청소년들이 유행처럼 닛코폭포로 달려가 집단자살을 꾀하자 당황한 일본 정부는 아예 폭포부근을 폐쇄해 버렸다.

만족하지 않는 한 인간은 항상 허기진 동물이다. 재물과 권력욕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스스로 목숨을 단절한 인사들과, 자기불만을 남의 목숨을 끊는 타살로 대리만족하는 천인공노할 흉악범의 자살은 대의명분도 아닐 뿐더러 ‘사의 찬미’에 속하지 않는다. 죽기 아니면 살기라는 말을 자주 입에 담는 민족이다 보니 목숨을 끊는 것으로 면죄부를 얻으려고 하나 죽는다고 모든 게 종결되는 건 아니다.

모든 생명체는 연기(緣起)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법칙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하물며 국법을 입안하는 입법부에 몸담고 있는 분들이 걸핏하면 할복 운운 하거나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으로 무죄타령을 주장하며 법의 존엄성을 무시하고 인명을 경시하는 태도 역시 정치인으로서의 대도는 분명 아닌 것 같다. 필자가 기억하는 한 그런 인사들치고 할복한 전례는 전무하며 또한 그처럼 무치한 사람들에게 베르테르 효과를 기대한다는 것과 신선도 높은 정치 DNA를 원하는 자체가 무망한 노릇일 테니까.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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