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봉 칼럼] 대사여, 무엇이 애국입니까?

  • 입력 2012.08.31 00:00
  • 기자명 경남연합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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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과 더불어 이 땅에서 가장 지루하고 불행했던 전쟁은 임진과 정유재란이다. 선조대왕 37년 갑진년이니 1604년이다. 당대의 도승이자 스승인 팔도도총섭 서산대사가 열반했다는 부음을 듣고 묘향산으로 달려가던 사명당 유정대사는 중도에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스승의 임종을 치르지도 못했다. 나랏일이 더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조 선조실록과 징비록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그토록 그악했던 왜구들이 풍신수길의 죽음으로 전란에 종지부를 찍고 그의 뒤를 이은 덕천가강(도꾸가와 이에야스)이 강화를 요청해왔으나 신하들 가운데 아무도 먼저 나서서 사신으로 가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왕이 통탄하고 있는 차에 비국당상이 여쭙길 사명당은 승군의 대장이 되어 왜적을 누차 무찔렀고 더군다나 ‘중이라 처자식’이 없으니 그를 정사(正使)로 임명해 보내면 어떻습니까? 라는 어처구니 없는 제안을 하자 선조는 마지못해 탄식하며 윤허했다.

그러나 사명당이 스승의 장례도 치루지 못하고 되돌아오는 중에도 조정은 ‘천한 중놈에게 국가의 중대사’를 맡길 수 없다며 붕당 싸움으로 격돌했으나 결국 탁상공론으로 시간만 보내자 선조는 탑전에 든 사명당에게 직접 친필로 ‘대선교 등계 승의병 대장군 겸지 이조판서 의금부사 사명당 유정 통제군 사명(大禪敎 登階 僧義兵 大將軍 兼知 吏曹判書 義禁府事 四溟堂 惟政 統制軍 司命)이란 사명기(司命旗)’를 하사하고는 “국가의 안위가 이제 대사의 한 몸에 달렸으니 부디 왜구와 잘 담판해 전쟁을 종식시키고 붙잡혀간 백성들을 한 명이라도 더 송환시키도록 하시오” 명하고는 사명당을 호위하는 선배비장에는 병조판서 이유진, 후배비장에는 훈련대장 안몽규, 종사 집사관에는 어영대장 유종성, 시배종에는 승군별장인 석변덕과 취혜를 삼았다.
이윽고 대사가 좌우 비장들의 호위를 받으며 궁궐 문을 나가자 오성 이항복을 비롯한 명공거경(名公巨卿)들이 도성 밖까지 배종하여 이별을 슬퍼하는 칭송시를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 대사께 바쳤다. 그 가운데 한음 이덕형은 사지(死地)로 들어가 되돌아 올 기약이 없는 대사에게 이 같은 시를 적어 위로하고 있다.

“분분한 개구리의 구덩이는 수없이 보았지만/ 누가 구만리 창공을 날아가는 대붕(大鵬)의 위대함을 보았는가/ 가시는 길 날씨가 좋으니 다행이구려/ 모든 행적이 속세를 놀라게 하였으니 공 또한 높을 것입니다/ 여기에 음식 많으나 먹을 자격 있는 사람 드물고/ 다행히 대사께서 있으니 세상의 자랑이로세 / 늙으신 스님 배 저어 돌아오시는 날/ 부디 요마(妖魔 왜구)의 항복을 받아 오소서.”
사신일행이 드디어 장도에 오르자 진위현감 심경준이 제도관으로, 경기관찰사 채명우가 호송관으로 도성 밖 30리까지 배웅했다. 대사가 일본으로 건너가 3000여명의 백성과 특히 통도사에서 왜구들이 갈취해간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두 되받아 온 것은 국가의 큰 복이다. 후일 명나라 대장군 이여송 역시 후일 이 같은 시를 보내 대사를 치하 했으니 다음과 같다.
“공명과 이익은 도모할 뜻이 없고/ 도학과 참선으로만 세월을 보냈네/ 나라가 위급존망하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산속에 계신 스님께서 하산하였도다.”
그로부터 수 백년이 흐른 요즈음. 독도문제로 한. 일 양국이 전쟁불사라도 할 것처럼 이성을 잃고 있고 국가원수를 뽑는 대선경선에 뛰어든 후보자들 역시 한 목소리로 애국애족과 강토지킴이로 나서겠다고 호언장담을 배설물처럼 내 쏟고 있는 중이다. 그분들에게 전하노니 군왕과 백성을 버리고 줄행랑친 선비들과 달리 정규군도 아닌 승려들이 대나무창과 농기구를 들고 목숨 버려 강토를 지켜내 호국영령의 반열에 오른 역사는 기억해 두어야 할 것이다. 국가와 민족을 배신한 인간들과 불교와 스님들을 사탄이라며 무조건 배척하려드는 이교도들이 누군 줄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판단이기에.

비록 시대가 다르다고는 하나 천한 중들(?)보다 못한 자질 없는 국가원수와 지역지도자를 선출하는 우를 국민들이 부디 범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8월 하순, 인적마저 끊긴 불세출의 영웅이자 수행자인 사명대사의 생가인 밀양 무안면 고라리를 나서며 ‘대사여, 무엇이 진정한 애국입니까?” 라고 탑비 앞에 무릎 꿇고 여쭈었으나, 대사는 “애국은 말로 하는 게 아니다!” 라는 무언의 사자후로 필자를 호되게 나무라며 돌려세웠다.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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