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산책]열 받는 피서길

  • 입력 2006.08.22 00:00
  • 기자명 강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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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받는다. 30도를 웃도는 날씨에 온 몸이 후끈거린다.

열 받는다. 주변 소식에 열 받는다.

택시기사는 얼마나 경제가 어려운지 손님이 없다며 볼멘소리다. 시장상인들은 채소값, 과일값이 올라 장사가 안된다며 너덜너덜한 천원짜리 지폐를 몇 번이고 세고 있다.

옆집 김반장은 다니던 공장이 다른 기업으로 넘어가는 통에 직장을 잃었다고 한다. 아랫집 이반장은 그나마 계약직에 뽑혔다며 얼굴이 밝다. 오버헤드크레인(OHC)기사자격증을 쓰다듬는 이반장은 백만원 정도나마 월급을 받을 수 있지만 다른 동료들은 오갈 데가 없다.

이러다 보니 성인오락실이 호황을 누린다. 갈곳 잃은 실직자가 쉽게 마음 붙이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오락실이다 보니 성인 오락실이 많이 생긴다고 한다.

그러나 오락게임도 따지고 보면 도박이 아닌가. 오락기에 매달리다 잃은 돈이 적게는 몇 십만원에서 몇 백만원이 예사라고 한다. 답답하고 짜증난다.

짜증나는 일상이 혹서기를 맞아 더욱 열 받으니 피서지를 찾는다.

기계는 기계대로 아무리 쇳덩이지만 일년내내 돌려대니 마모가 되지 않겠는가. 쇳덩이도 열 받으니 재정비가 불가피하다. 그래서 대부분 기업들이 8월 초순이면 휴가기에 든다. 일주일이나 보름 정도 휴가기간을 잡아 지친 머리를 식히고 기계도 재정비한다.

거리에 나선 피서객들 마음이 뜨겁다. 뜨거운 마음을 승용차에 담고 길을 나서보니 고속도로 입구서부터 차량행렬이 끝없다. 차 속에 갇혀 에어컨을 2단, 3단으로 돌리다 보니 실내는 서늘하지만 차체는 열 받는다.

저 빼곡한 차들이 다들 열을 뿜어대니 길 바닥이 열 받아 후끈후끈 찐다. 겨우 목적지에 당도하여 “와- 다 왔다.” 환성도 잠시, 주차가 문제다.

목적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주차해 두어도 이런 불편은 없을 텐데 다들 조금이라도 덜 걸으려다 보니 도로 양켠이 주차장이다. 왕복 이차선이 편도 일차선이 되었으니 오고가는 차량들이 애를 먹는다.

겨우 차를 세우고 숙소로 들어오니 사람 구경도 재미있다. 요사이 속옷 같은 유행패션을 귀엽게 보던 즐거움이 엘리베이터 속에서 망가진다.

대학생인 듯한 남녀가 ‘쭈쭈바’를 자르며 장난을 치더니 얼음뭉치가 엘리베이터 숫자버튼에 튕겼다. 그 얼음이 금세 뿌연 물이 되어 흘러내리는데도 아랑곳않고 계속 낄낄대는, 저 풋풋한 대학생의 도덕불감증에 열 받는다.

배정된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툭 트인 창이 눈에 든다. 창 밖의 초록빛 들판에 나비처럼 앉고 싶다. 그 곁에 오랜만에 들어보는 파도소리, 바다의 치마폭은 넓고 끝 없다.

그래, 이거야, 이제 이 바다와 들판에다 찌든 일상과 스트레스를 씻어 내야지, 하고 짐을 푼다. 대충 짐을 풀고 물을 마시려 컵을 꺼내보니 이가 빠져 있다. 이부자리를 펴 보니 머리카락이 묻어 있다. 아쉽다, 앞에 머물다 간 사람의 배려가 아쉽다. 조금만 신경써 주면 뒷사람이 상쾌하게 피서를 즐기고 건강해진 마음으로 되돌아 갈 수 있을 텐데 말이다.

열 식히러 나선 피서길, 몸에 가득 고인 열을 길에다 쏟으니 길이 열 받고 그렇게 열 받은 길들이 바다에 당도하여 열을 뱉어대니 바다가 열 받는다.

아, 열 받는 세상!

강정이/시인.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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