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롭고 차별 없는 도정 펼치겠다

피라미 낚시로 보낸 유년시절…가난 피해 이곳 저곳 이사

  • 입력 2012.12.21 00:00
  • 기자명 이민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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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있는 도지사! 당당한 경남시대! 파워풀 도지사의 슬로건으로 선거에 돌입해 압도적으로 당선된 홍준표 경남도지사는 피폐한 도정을 바로 세우고 당당한 경남시대를 열겠다. 선거 과정에서 누구를 지지했던 경남의 발전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모두를 마음에 담아 서민 도지사, 깨끗한 도지사, 힘 있는 도지사, 정의로운 도지사, 차별 없는 도정을 펼치겠다고 밝힌 홍 지사의 살아온 지난 삶을 알아본다.[편집자주]

△ 피라미 낚시로 보낸 유년의 강변
홍준표 경남지사는 1954년 창녕 출생, 유소년기를 합천군 밤마리 낙동강변에서 성장했다.
그는 어린시절 회고에서 나의 아침 일과는 새벽에 일어나 밤마리 강변에 나가 피라미 한 주전자를 잡는 일이며, 아버지는 피라미회로 아침식사, 8km 떨어진 학남국민학교로 걸어서 등교를 했다.
또 아버지는 일제시대 한학, 해방 이후 한량으로 평생을 보낸 소위 ‘무능력한 가장’으로 인해 어머니는 달비장수(머리카락 수집상, 가발 수출용)를 하면서 걸어서 보름동안 서부경남 일대를 돌면서 머리카락 수집, 집으로 돌아올 때는 너무 굶어서 쓰러지시곤 했다고 했다.
합천에서 어린시절 매년 겪는 일이지만 유일한 재산의 시골집은 낙동강 황톳물 속에서 하천부지와 함께 물속에 잠기는 것을 목격하면서 자랐다. 10여년 뒤 집이 불에 타 울산으로 쫒기 듯 이사를 가게 됐다.

홍 지사는 지독히도 가난했던 시절 ‘보리고개’를 회상, 빈곤의 악순환으로 부잣집의 횡포는 나아가 자기집 머슴 부리듯 무상으로 부잣집의 농사일을 거들어 줄 것을 요구, 때로는 아버님 어머님만으로도 모자라 자식들도 머슴처럼 일해 주어야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또래 친구집에 가서 머슴처럼 일 한다는 것이 참으로 부끄럽고 창피했으며, 5·16직후 고리채 정리조치때, 법에 따라 신고한 부모님이 부자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현장도 생생하게 본 일이 있다고 했다.
너무나 가난해 살길을 찾아 대구로 이사, 어머님과 누이들(작은누나 4학년·여동생 1학년) 과일 노점상, 다시 창녕읍으로 이사, 리어카에 이삿짐 싣고 2일 동안 걸어서 이사, 드라마 ‘모래시계’에서는 이 장면이 달구지를 타고 이사 가는 것으로 묘사 됐으며, 부모님 양은 그릇 장사 실패, 합천 산골로 들어가시고, 남매들만 창녕에서 자취를 했다.

△ 영남중·고등학교
대구 영남 중학교에 진학한 것은 전적으로 홍 지사의 고집 탓, 가난을 대물림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도시에서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에 각고의 노력 끝에 특대생(장학생)이 됐다.
특히 영남중고 6년 동안 그는 단한번도 도시락을 못싸가 점심때는 수돗가에서 ‘물배’를 채웠고, 작은 누나 국졸, 방직공장에 취직, 작은 누나의 희생으로 중·고·대학 다녔다.

△ 고려대학교
홍 지사는 1971년말 육군사관학교 특차 시험 합격했다. 그러나 아버지 누명으로 경찰에서 고생하는 것을 목격한 후 법과 대학에 지원하기로 작정, 부랴 부랴 문과 공부를 다시 시작, 한달 후에 고려대학교 법대 합격했다.
하지만 고려대 입학 1년 만에 제적, 밤마리 나루터 뱃사공 보조로 일하다 1974년 복학했으며, 아버지는 현대중공업 야간 경비원, 누나와 여동생은 각자 취업전선으로 울산 복산동 단칸 월셋방, 밑바닥 생활은 참으로 비참했다. 1년 후 아버지는 평소 지병으로 작고, 병명도 모르고, 큰 병원에 가보지도 못했다.

△ 무작정 상경, 입주 가정교사 등으로 고학, 방위병 입대
홍 지사는 1972년 2월 24일 대구에서 밤11시 50분 특급열차를 타고 새벽 6시에 서울역 도착, 아버지가 준 1만4000원(하숙비 1만원)으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서울생활 시작, 입학시험 치를 때 그 전날 올라와서 시험치고 그 이튿날 고속버스 타고 내려 가본 것이 서울 경험의 전부였다.
특히 드라마 ‘모래시계’에서는 공수 부대원으로 묘사되었으나 사실 방위병 출신이다. 대학 4학년 봄 신검, 당시 몸무게 46km, 시력과 병력이 추가, 4급 판정을 받아 방위병으로 제대했다. 현역병으로 간 아들들은 홍 지사가 고시 합격하고, 법무관으로 제대한 줄로 알고 있다가 방위병 출신임을 알고 무척 실망했다고 웃음을 지었다.

△ 아내
1976년 3월초 국민은행 안암동 지점의 창구에 앉아있는 보름달 같은 아가씨였다. 그는 그 지점에 근무하는 법대 선배의 도움을 받아 10월부터 교제 시작, 당시 그는 46km, 아내는 키 156cm에 55km, 통통한 체격이었다.
사법시험을 합격하던 해 결혼, 서로 돈이 없어 홍 지사의 전제산인 42만원으로 지하 단칸 셋방에서 신혼 시작, 사법연수원 2년차일 때 2층의 방 2개짜리로 이사를 했다.

△ 사법시험
1976년부터 시작된 사법 시험의 도전은 6년간 계속적인 낙방으로 사실상 포기, 군 복무를 마친 후 연합철강에 취직, 회사 총무부에서 주식, 사채, 홍보, 섭외, 인쇄, 방송 등 회사 잡무, 1981년말 사직, 다시 고시공부를 시작해 1982년 7월, 시험을 치른 후 낙방을 예감, 한라자원에 취직, 파푸아 뉴기니에서 근무키로 확정 후, 사법시험 합격 통보 받았다.

△ 권력형 비리수사
1988년 10월, 5공비리 수사의 백미였던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사건, 전두환 정권의 실세들이 노태우 정권에 그대로 이어져 내려와 그 사건에 연루, 1988년 10월 초, 전격적으로 전두환 대통령 생질을 변호사법 위반으로 구속, 여론의 힘을 얻어 노량진 수산시장 강탈사건 수사를 착수했다.
당시 12월 중순까지 45일간 철야 수사해 전두환 대통령의 큰형 전기환씨가 청와대 민정 수석, 서울시장, 치안본부 간부, 현직고위 법관, 감사원 사무총장 등을 총동원해 멀쩡하게 잘 운영되던 수산시장을 탈세와 수사로 협박해 강탈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사건 수사도중 검찰 고위층은 끝없이 수사중단을 요구와 수사방해를 했다. 그러나 언론의 도움으로 사건의 전모를 밝혔다. 하지만 그는 사건의 전모를 밝힌 후 좌천, 수사기록은 대검에 빼앗기고, 그 기록을 가져간 대검 중수부는 끈 떨어진 민정수석 한 명만 달랑 집어넣고 사건 종결했다.
그 사건이후 검찰 내부에서 ‘통제할 수 없는 검사’로 낙인 찍혔다. 마지막 슬롯머신사건 수사, 배수의 진을 치고 수사해 성공, 그러나 그 사건으로 그는 검찰을 떠날 수 밖에 없었다.

△ 드라마 모래시계에 얽힌 이야기
특히 드라마 ‘모래시계’는 홍 지시를 스타로 만든 계기됐다. 1993년 3월, 3년간의 준비 끝에 시작된 슬롯머신 사건 7월 중순께에 종료했다.
한국사회의 성역을 최초로 타파한 사건이어서 국민들은 통쾌하기 이를데 없었지만 이 사건으로 그는 검찰 내부의 미움을 받아 사표를 제출하게 됐다.
홍 후보는 이 사건을 소재로 드라마를 제작하겠다는 제작진이 사건 수사이후 1년이 지난 1994년 여름경 찾아왔으나 2~3차례 거절하다가 상부에서 검사를 정의로운 사람으로 해 준다고 하니 협조를 하라고 해 협조한다.
이 드라마 제작진은 처음에 최민수씨를 검사로 추천, 홍 후보는 최재성씨를 검사로 추천 했으나, 결국 박상원씨가 검사역으로 낙점됐고, ‘모래시계’에 나오는 많은 부분은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이건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드라마에 나오는 사실과 진실의 차이점에 대해 질문을 받았다. 특히 아내는 드라마에서 고현정이 맡았던 역할의 실재 인물이 있었냐며 많은 질문을 받았다.

△ 억울한 사표
홍 지사는 검찰 고위간부의 비리를 파헤쳐 검찰조직에 치명적인 상처를 안겨주었다는 이유로 ‘슬롯머신’ 수사 이후 2년 6개월 가량 따돌림을 받다가 검찰을 떠났다.
1995년 10월초 검사를 그만 둘 때 그는 시골로 귀향하고자 했다. 그러나 검사사직 후 조직 폭력배들의 협박 전화가 계속 돼 검사가 현직을 버리면 법적보호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전직 검사를 보호해 주는 제도적 장치가 없다는 것을 알고 가족의 안위 때문에라도 제도권 재진입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무작정 정치에 입문했다.

△ 무작정 도미(渡美), 복귀
1999년 3월, 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도중 의원직 사퇴, 워싱턴에서 7개월간 체류하면서 이명박 대통령·손학규와의 교분, 그 당시 MB는 선거법위반으로 의원직 상실, 손학규는 경기지사 선거 낙선 후 워싱턴 체류했다.
당시 국내 일부 언론에서 ‘워싱턴 오리알 3인방’이라 지칭, 이들은 워싱턴에서 서울시장, 경기지사, 국회로 복귀를 서로 꿈꾸며 서로 격려, 실제로 그 꿈은 3년 후 모두 이루어졌다.

△모든 것 다 버린 후 고향봉사 기회 찾아와
홍준표 도지사는 새누리당 당대표직에서 2011년 12월 사표를 냈으며, 김두관 전 도지사의 대선출마로 인해 경남지사의 자리가 공석이 돼 고향에 봉사할 기회가 찾아왔다.
그는 고향의 봉사를 위해 지난 2012년 9월 초순부터 도내의 각처에 민생탐방을 시작해 경남도지사 출마를 저울질 했다.
민생탐방으로 출마의지를 확정한 후 올해 10월 초순경 경선에 참여해 경쟁자들과의 담판에서 모든 역경을 딛고 새누리당의 최종후보로 선정돼, 권영길 야당단일 후보를 압도적으로 이기며 경남도지사에 당선됐다.

/강종갑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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