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 25시

  • 입력 2006.08.24 00:00
  • 기자명 강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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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한반도’를 보았습니다. 그냥 볼 만했다 싶습니다. 그 중에서 인상에 강하게 남은 장면들이 있습니다. 고종 황제가 일본놈들과 매국 대신들에게 협박당하는 장면과 현실의 대통령이 일본과 주변 신하들에 의해 곤경에 처하는 장면을 교차시킨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진실은 철학의 문제입니다)을 떠나서 분노를 자아내게 하였습니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것은 ‘질적 시간’에 관한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시간은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흔히 달력이나 시계를 보며 따지는 ‘양적 시간’입니다.

‘양적 시간’은 공간과 시간 자체의 단절성에 의해 너와 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분리시킵니다. 그러나 ‘질적 시간’은 이런 모든 것을 뛰어 넘습니다. 시대와 장소가 다른 곳에 있다 하더라도 같은 사건을 겪은 사람이라면 서로 같은 의미의 시간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태풍 매미’의 아픔을 당하고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쓰나미’의 고통과 공포를 함께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비록 (양적)시간으로 차이가 있고 먼 나라 일이지만, ‘질적 시간’으로는 ‘같은 시대·같은 장소’를 사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영화라는 상상과 작업의 산물 속 사건에서 우리는 ‘질적 시간’을 공유하며 함께 분노하게 됩니다. 나라를 빼앗기는 고종황제의 비통한 마음과 자칫 야비한 일본 앞에 비참하게 무릎 끓어야 할지도 모를 현실 대통령의 곤혹스러움과 우리의 애국심이 함께 뒤섞여서 동일화 되는 것입니다.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일본의 만행에 ‘비분강개’하며 대한민국의 승리로 귀결되는 결말에 통쾌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영화일 뿐입니다. 현실은 모질고도 혹독하여 사회의 많은 부분이 영화와는 다릅니다. 독립 운동가의 후손들이 생활고에 시달리는 것이라든지, 일제에 부역하여 민족을 팔아넘겨(생계형 친일이 아닌) ‘호의호식’한 매국노와 그 자손들이 아직도 제대로 된 심판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 잘 먹고 잘 입으면서 도리어 친일의 대가로 얻은 재산들을 되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알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에 대해 잠시 분통을 터뜨리다가 시간이 지나면 잊어버리기 일쑤입니다.

잊지 말고 끝까지 결과를 확인하고, 결과에 따른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하는 일들은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요즘 한창 진행 중인(정부 표현대로 하면 ‘아주 순조로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대표적입니다. 한국식 경제 종말론을 주장하며, 미국과 자유무역협정을 통해서만 경제가 살아날 것이라고 믿고 주장하는 ‘김현종’(꼭 기억해야 합니다)이라는 사람이 통상교섭본부장으로 일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미국식이든 영국식이든,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경제가 원활하게 잘 돌아가고 양극화가 해소된다면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미 미국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맺었던 멕시코는 양극화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멕시코 정부도 협정을 맺기 전에는 양극화나 경제의 미국 예속화가 과장된 걱정이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우려했던 대로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경제의 현실은 많은 전문가들이 지적하듯이 미국에 문을 활짝 열 처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직 차분히 따지고 반대편 의견을 들을 시간이 있음에도 현 정부는 밀어붙이기식으로 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양극화’의 가난한 쪽에 서 있는 서민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실패로 고통받는 멕시코인들과 같은 ‘질적 시간’ 속에 사는 것입니다. 협정체결 후 세월이 흘러 양극화가 더욱 심화되어 서민들의 삶이 피폐해졌을 때 우리는 꼭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이 정부와 협상 대표들을.

백남해/천주교정의구현 마산교구 사제단 대표.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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