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의 일기] 15. 진정한 신사는

  • 입력 2006.08.31 00:00
  • 기자명 이현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늘이야 말로 ‘바로 그 날’이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빨강 지붕 집 여인들은 섬이와 날 남겨두고 아침 일찍 외출했다.

할머니의 천식 정기검진과 할머니의 엄마 되시는 꼬부랑 할머니가 계신 요양원을 방문하고 돌아오려면 꽤 시간이 걸려 늦을 거라며 심심해도 참고 잘 지내고 있으라는 말이 있었다.

같은 지경 안에서 함께 몇 해를 넘기며 살아오면서도 섬이와는 가슴을 터놓고 하는 대화를 해 본 적이 없다. 섬이를 ‘내 사랑’이라 혼자 생각하고는 있지만 결정적인 순간엔 혼자 살겠다고 바둥대는 나 자신을 보면 강한 수치심에 휩싸인다.

어제, 종일 우르릉대던 천둥소리에 무서워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던 섬이는 안중에도 없이 어찌됐든 ‘나는 살아남아야한다’는 이기적인 생각에 사로잡혀있었던 나였다. 그리고 얼마 전엔 혼자 벌 받는 게 억울해서 섬이를 참소하기까지 했다.

다행히 어제의 무시무시하던 하늘은 우리 둘 아무에게도 털끝하나 다치게 하지 않고 고이 살려두
었다.

바로 그 날이란, 허심탄회한 대화를 통해 섬이와 나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날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 한 말이다.

자지러지는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간간이 한낮의 고요를 깨고 있었다.

어찌나 필사적으로 울어대는지 그 기세에 놀라, 가을이 저만치서 오다가도 마냥 주춤거리고 있을 것만 같다.

섬이는 빨강 지붕 집 건물이 드리우는 그늘 한 구석에 구덩이를 파고 축축한 흙바닥에 엎드려 눈을 감고 있었다. 새침데기 그니는 결코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일이 없다.
곁눈질로 날 한번 슬쩍 쳐다볼 뿐 미동도 않는다.

아주 가까이서 보는 섬이의 얼굴은 낯설어 보일만큼 노화의 흔적들이 뚜렷하다.

출산과 탈모로 몸도 몰라보게 수척해져있어서 가여운 마음이 들었다.

나는 어눌하지만 진실된 마음으로 그동안 쌓인 회포를 풀기 시작했다.

그리 넉넉한 형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몇 달간 훈련소에 보내어 교육을 받게 하여 견문을 넓힌 나와는 달리 섬이는 그런 혜택을 받지 못했다. 성(性)차별이나 기타의 불합리한 구별이 아닌 경제적 여건 때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건장한 대형견인데 비해 섬이는 왜소한 소형견이다.

그런 연고로 빨강 지붕 집 식구들은, 섬이에게는 조금 너그러운 반면에 나에게는
‘하나라도 더 배운 이가 모범을 보여야한다’며 엄격한 편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끔씩, 상대적 박탈감에 어리석게도 섬이 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있었다면 부디 못난 이놈을 용서하라고 했다. 그리고 조금 다른 얘기지만, 어둠이 걷히고 물체의 식별이 가능해질 때면 그니의 처소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간다는 얘긴 차마 못했다. 행여 그니가 보이지 않으면 난 못견뎌하며 괴로워했다. 사랑이냐고? 글쎄, 그렇다기보다 오랜 시간 동안의 ‘길들여짐’이나 ‘익숙함’때문이 아닐까.

긴 침묵 끝에 마침내 섬이가 입을 열었다.

날더러 자신 때문에 자책하지 말라고.

얼마 전 ‘불볕아래 홀로 벌서기’건에 대해선 섬이 자신도 미안하게 생각하며, 나머지 나의 치졸했던 부분에 대해서도 이해하노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기다리던 말이 이어졌다.

앞으로 좋은 친구로 남겠으니, 나더러 든든하고 믿음직한 벗이 되어 달라 했다.대화의 봇물이 터지자 이런저런 지난날의 얘기들이 쏟아졌지만, 섬이는 자신으로 인한 나의 아픈 상처를 건드리지 않는 세심한 배려를 보였다.

섬이와 난 처음으로 마주보고 웃었다.

평소 아녜스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진정한 신사는 나이 든 여자에게도, 예쁘지 않은 여자에게도 예의 바르고 친절한 법이라고.난 아줌마라는 제 3의 성(性)을 사는 섬이에게 진정한 신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이덕아 / 남원 작은학교 교사
저작권자 © 경남연합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