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숙 에세이]오늘도 ‘한턱’

  • 입력 2007.07.25 00:00
  • 기자명 권경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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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모퉁이를 돌아가는 기차는 쓴 약 같은 기적소리로 울고, 들에는 뜨거운 여름이 침묵을 지키며 무겁게 내려앉아 있는 농가의 한적함 들이 차창을 통해 여러 겹으로 흐릿하게 변화하는 빛 속에서 마치 현실로부터 떨어진 듯 황홀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일탈을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에 겨웠다.

입구의 느티나무 사이로 멀리서 한낮의 푸른 향기가 스며 오고, 길옆에는 억제 할 수 없는 분방한 생명력을 지닌 산나리의 통통한 줄기가 보였다. 절 마당 에는 연꽃이라는 또 다른 한 무리의 여름이 고요하고도 기대에 찬 세계를 바라보고 있는 모습에서 나라는 존재는 이방인 그 자체였다.

무념의 상태. 하루만이라도 조용하게, 그러나 헛되지 않게 라는 생각으로 조용한 사찰순례를 나섰는데 번잡한 일상에서의 탈출은 얼마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전화기 저쪽의 상황은 뙤약볕보다 더 뜨겁게 달구어져 금방이라고 무엇이든 녹여 버릴 것 같았다. 또래들끼리의 농구시합에서 ‘MVP’ 가 되었기에 모두들에게 ’한턱‘을 내어야 한다는 설명 중에도 아이의 기분은 장원급제라도 한 것인 냥 들떠 있었다.

휴일 날 미루었던 공부를 보충하기를 고대 하던 엄마의 마음과는 너무나도 먼 거사를 치룬 아이와의 대화는 하나의 유희이고, 하나의 오락이었고 결과를 문제 삼지 않는 순수하게 미적인 행위가 되어 버렸다. 이 순간 엄마의 한턱에 대한 거절이 아이의 생활은 너무도 초라하게 할 것 같았고, 삶에 아무런 즐거움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흔쾌히 동의를 해 주었다. ‘입장의 동일함’ 그것은 관계의 최고 형태라고 어느 책에서 본 기억이 난다. 풀들이 비가 내릴 때마다 초록빛이 짙어 가고 윤기를 더해 가듯이 내 아이도 엄마의 동조가 건강한 정신을 키울 것 같았고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려면 양적인 변화가 먼저 일어나야 할 것 같아 사소한 것부터라도 경사로 생각하고 대접하는 것으로 스스로에게 위안을 삼기로 하였다.

우리 민족은 기분에 많이 지배를 받는 민족이다. 월드컵 경기 때의 거리응원을 봐도 상상을 초월한 응원문화가 그렇고, 요즘 다시 붐이 일어나고 있는 프로야구가 부산에서 열리는 날이면 시민들은 모두 홈팀이 이기기를 기원하지만 결과에 상관없이 모두들에게 인심을 쓰는데 이기면 술집마다 부산 술을 공짜로 주며, 비록 결과는 이기지 못했더라도 스스로들을 위로 차원에서 내일을 기원하며 인심을 권하므로 부산의 시장경기가 되살아난다고 한다. 자신의 직접적인 일이 아니어도 순간순간을 음미 할 줄 알고 그 의미가치를 아는 재주를 가진 뛰어난 민족이라는 사실을 또 한번 경험했다.

조선시대 풍속 중에 ‘고대주’라는 것이 있는데 아내가 산월에 접어들면 남편이 술잔치를 베풀었다고 한다. 고대하던 아들을 낳으면 ‘확실주’요 딸을 낳으면 ‘애석주’를 내어야 하던 것과 아들이 과거 시험에 합격하기를 기대하며 그 소식을 전하는 하인들에게 ‘까치주’와 ‘낙방주’를, 전국에서 찾아온 친척들에게는 ‘십촌주’ 고을 사람들에게는 ‘유가주…’를 내어 놓던 부모의 마음. 기분에 의한 생활이지만 생각이 꽃잎처럼 피어오르는 아름다운 풍속이었다.

오늘 날 일상에서 눈곱만한 경사가 나도 ‘한턱‘이라는 손재를 하지 않고는 배겨 낼 수 없는 것도 서양에 없는 유구한 전통이 아닐까?! 지나치지만 않으면 멋진 민족적 심성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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