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영숙 에세이]재즈 - 묵힘과 삭힘

  • 입력 2007.10.24 00:00
  • 기자명 권경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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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이라는 것이 몇 세기전의 르네상스 인을 원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예능이나 기술이라는 한정된 영역이 아니라 다양한 지식을 가진 총체적이고도 다각적 사고를 가진 인간상을 요청하다보니 한정된 시간에 많은 것을 여러 곳에서 쏟아 붇는 듯 하다. 이 과정에서 놓치고 있는 하나가 ‘성숙한 정신’이 아닌가 싶다.

정연하게 잘 정리된 지식들만 좇다보니 자연스레 이웃집에 놀러가서 알게 되는 상식이나 자연이 키워주는 관습들은 박제가 되어 어느 후미진 곳에 박혀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고등학교 1학년인 아들본인의 지상 최대 목표가 ‘입시’다. 본인이 원하는 대학에 가서 장래의 꿈을 펼쳐 보는 것이란다. 그렇다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면서 모든 신경이 성적에 쏠려 있고 나니 정신적 여유가 없는 것 같아 불안해 보이고, 본인의 일에만 관심을 가질 뿐, 계절의 변화나 동생의 어떤 일에도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엄마로서 겁이 나는 것은 무관심이 습관화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다.

어떤 철학자는 이 무관심을 “역설적인 깊이와 복잡성을 드러내는 의외의 통로가 되기도 한다”고 하여 아들을 세심하게 관찰도 해 보았지만 그런 깊은 정신세계는 없는 듯 하고 오로지 본인의 일에만 충실한 것은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고정된 진리, 객관적 대상, 그리고 변치 않는 실재에 의해서 일률적으로 통제되는 경직된 생각과 상상력을 어떻게 되돌릴 것인가? 단호한 태도의 전향이 필요하다. 파편화된 명제나 맥락 없이 주어지는 규범들은 망명정부의 구겨진 지폐처럼 생명력을 잃은 기호에 불과하다.

어느 컴퓨터광고에 ‘유목민을 꿈꾼다’라는 것을 보고 이미 이 사회는 인간으로의 회귀 바람이 일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하필이며 이 시대 기계문명을 대표하는 물건이라는데 우연을 느끼며 실소 하였다. 유목민이란 다양한 조직, 코드, 회로 등 통제와 구속의 덫들에서 벗어남으로써 기계의 지배영토를 넘어서는 해방된 영혼을 말한다고 한다. 내 나름대로의 재해석을 해보면 그것은 핑계할 수 없는 자유의지를,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움, 끊임없는 해석에 따라 즉흥적으로 연주하는 재즈의 원숙미와 인간미. 클래식의 균형과 기품이 있으면서도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맛 볼 수 있는 것은 시간 속에 배여 있는 여유로움의 묵힘과 또 그 속에서 일어나는 삭힘의 힘일 것이다.

그것이 폭풍우 이는 바다 한가운데 난파된 상황의 뗏목처럼 실낱같은 희망을 부여잡고 싶다. 불가능 앞에서 당당하게 가능케 하고 싶다.

진정 르네상스를 꿈꾼다면 다시 시작 해 보자. 우리 아이들을 인간미 넘치는 사람으로 키워보자. 무엇이든 성의를 다해 자주 하다보면 길이 생기는 법이다. 또 그 길이 나름의 이치와 규범을 만들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차이와 주변을 볼 줄 아는 깊고도 넓은 눈, 겉모습보다는 속 모습을 가꿀 줄 아는, 의식의 지향성을 꿈꾸는 젊은이의 부활을 기대해 보자.

나의 스승님 시구에 ‘고통도 발효가 되면 쓸쓸한 노래가 된다’라는 말씀을 이제야 알게 됨은 무슨 조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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