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가을과 청학동

  • 입력 2007.11.06 00:00
  • 기자명 이일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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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이인로(1152-1222)는 “지리산은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대방군(帶方郡)에 이르러 수천리나 서리고 맺히었으니, …고로(古老)들이 서로 전하여 이르기를 지리산 안에 청학동이 있는데, 길이 매우 좁아서 사람이 근근이 통할만 하고 부복(俯伏)하여 수리쯤 지나가면 허광(虛曠)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사우(四隅)가 양전옥토이어서 곡식을 뿌려 가꾸기에 알맞고 청학(靑鶴)이 그 가운데 서식했기 때문에 이름붙인 것”이라며, 스스로 청학동에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지금의 지리산 화개동 신흥마을 부근에서 청학동을 찾았다. 그는 “화엄사에서부터 화개현에 이르러 신흥사에 유숙하니 지나는 곳마다 선경(仙境)아닌 곳이 없었다”고 했지만, “이른바 청학동이란 곳은 끝내 찾지 못했다”고 술회했다. 청학동 우리나라사람들의 이상향이고 유토피아이다.

조선시대 서산대사의 입산시도 신흥마을 부근에서 청학동을 찾고 있다.

“화개동에 꽃이 지는데 / 청학의 둥지에 학은 돌아오지 않네 / 잘 가거라. 홍류동에 흐르는 물이여 / 너는 바다로 돌아가고 / 나는 산으로 돌아가려네.”

서산대사는 15세의 나이에 거제도 유배길을 떠나는 스승을 따라 나섰다가 지리산 화개동의 의신사에서 입산했다. 그리고 이인로가 “선경 아닌 곳이 없다”고 표현한 신흥마을 부근에 눌러 앉아 십수년을 보낸다. 불후의 명작 <선가귀감>은 이 곳 신흥마을의 청허원에서 지은 책이다. 그 책의 표지에는 서산대사가 신흥마을에 살면서 붙인 당호인 청허당이라 적혀 있다.

서산이 시(詩)에서 ‘청학의 둥지’며 ‘홍류동’이라고 표현한 것은 ‘청학동’을 일컬어 한 말이다. 청학동에 홍류동이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 홍류동이라는 말은 ‘붉은 냇물’이라는 뜻인데, ‘붉은 냇물’이란 봄이 되면 꽃이 흘러서 붉고 가을되면 단풍이 흘러서 붉은 개울을 의미한다. 그래서 지리산의 화개동은 봄되면 꽃이 피어서 화개(花開)이고 가을되면 단풍이 덮어 화개이다. ‘꽃이 핀다’는 동작형의 지명이 화개 말고 또 있는가. 화개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 꽃이 핀다는 이야기이다. 그 꽃이 사철 흘러가는 냇물이 홍류동이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쓴 지리산 유람기를 보면, 지리산 중에서도 유달리 집중적으로 기술하고 또 한결같이 “가장 아름답다”고 예찬한 곳이 바로 청학동이다. 청학동과 함께 고운 최치원을 흠모하는 대목에서 유람기의 클라이막스가 된다. 물론 지금의 청학동을 일컫는 것은 아니었다.
남명 조식은 지리산을 유람하고 화개동의 쌍계석문 앞에 와서는 “그 옛날 학사 최치원이 오른쪽에는 ‘쌍계(雙磎)’, 왼쪽에는 석문(石門)이라는 네 글자를 손수 써 놓았다”며, “동쪽 구름 속에서 새어나와 산을 뚫고 까마득한 근원을 알 수 없는 곳에서 흘러오는 시내는 불일암이 있는 청학동의 물줄기”라고 말한다.

김일손은 지금의 불일산장 부근까지 올라가서 “꽤 넓고 평평하여 농사짓고 살 만한 곳이 나왔다. 여기가 세상에서 청학동이라고 하는 곳”이라고 쓰고 있다. 추강 남효온(1454-1492)도 불일암에 머물면서 “고운은 머물지 않고 돌아 가버렸고 / 청학은 어찌 그리 돌아오지 않는지 / …”라고 노래한다.

고운이 쌍계사의 산문에서 오른쪽과 왼쪽의 바위에 ‘쌍계석문’이라고 쓴 이유는 이 곳이 청학동의 입구라는 이야기이다. 청학동을 상징하는 것은 홍류동이라는 계곡물 뿐아니라, 석문도 있다. 청학동은 석문을 열고 들어간다.

실제로 지금의 하동 청학동 마을의 산에도 쇠통바위가 있다. 쇠통은 경상도 사투리로 자물통이라는 말인데, 그 바위의 자물통을 열고 청학동에 갈 수 있다는 말이다. 지금처럼 찻길이 없던 옛날에는 청학동 사람들이 삼신봉의 석문인 쇠통바위를 통해서 산능선을 타고 동점과 먹점과 미점이라는 지리산의 삼점 마을을 지나 하동읍에 오갔다.

청학동을 묘사한 홍류동이라는 골짜기는 가야산에도 있다. 그 골짜기가 너무 아름다워 최치원이 그 곳에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설화가 있는데, 그 이야기는 그 곳이 청학동이기 때문에 고운이 신선이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가을이 깊다. 올해의 단풍은 예년과 다르다. 여름이 길었고 비가 많았던 탓인지 단풍이 곱게 물들었다. 산의 단풍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도시의 가로수도 아름답게 채색됐다.

우리나라에서 단풍이 가장 아름다운 곳이 어디인가. 홍류동에 단풍잎이 흐르는 곳이다. 홍류동은 어디에 있는가. 청학동에 홍류동이 흐른다. 청학동은 어디에 있나. 지리산이거나 가야산이다.

//이현도 문화특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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