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의 소리]순국선열들의 넋을 돌아보다

  • 입력 2007.11.23 00:00
  • 기자명 문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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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부산항일학생의거가 일어난지 67주년을 맞는 날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부산에서는 지난 18일 경부이어달리기의 종착점인 부산에서 완주를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으며, 23일 부산항일학생의거 기념탑 앞에서의 기념식을 시작으로 부산시청에서는 부산지역 독립운동사에 관한 학술회의가 개최된다.

돌이켜보면, 앞서간 선열들은 암울한 현실에 굴하지 않고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셨다. 학생들은 역사적·정치적 변혁기마다 앞장 서 변혁의 주도적 역할을 해왔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데 기폭제가 된 것도 학생이었고,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주역도 학생이었으며, 광복된 조국에 민주, 정의를 뿌리내리기 위해 부정부패와 독재정권에 맞서 4.19민주혁명을 이끌어 낸 것도 학생이었다. 그리고 일제의 수탈이 극에 달했던 1940년에 부산에서 일본제국주의의 전시 민족차별적 교육정책에 항거하여 분연히 일어선 것도, 역시 학생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국내의 독립운동은 지하로 잠입하였고 학생들의 저항 역시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질곡의 시기에 동래중학(현 동래고)과 부산2상(현 개성고) 학생들이 궐기하여 일제의 학원병영화에 맞서 저항한 것이 바로 1940년 11월 23일 제2회 경남지역 학도 전력증강 국방 경기대회를 시발점으로 하여 일어난 부산학생항일운동(일명 노다이 사건)이다.

노다이 육군대좌는 당시 부산병참기지사령관이자 그날 부산공설운동장(현 구덕운동장)에서 개최되었던 경기의 심판장으로 시종일관 일본인학교에 유리하게 편파판정을 일삼으며 모욕적인 언사도 불사했다. 결국 일제의 부정과 편파적인 심판으로 동래중학이 2위로 밀려나자 학생들은 폐회식에서 애국가와 아리랑을 부르며 민족의 울분을 토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동래중학과 부산2상의 학생들 1,000여명이 주축이 되고 당시 입정상업학교, 초량상업학교 등 한국인 학생이 가세하여 대오를 형성, 항일구호를 외치며 어둠이 깔린 보수동, 광복동, 중앙동을 누볐다. 이후 하오 8시경 양교 상급생들 400여명이 다시 합류하여 노다이 관사를 습격했으며, 이에 일경과 헌병이 출동하여 200여명의 학생들이 피체되고 주동자로 지목된 15명이 구속기소 되어 그중 두 명은 8개월의 옥살이 후 출옥 2주일 만에 고문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학생들의 투쟁은 하루에 불과했으나 그 여파는 실로 엄청났다. 부산항일학생의거에서 보여준 그들의 의분(義憤)은 민족의식을 크게 고취시켜 조선독립당과 순국당 등 부산지역 학생 비밀결사가 태동하는 계기를 마련했고 일제 말기 수많은 학생들이 조국광복을 위해 몸을 던졌다. 순결하고 숭고한 학생들의 의기(義氣)가, 엄중한 일제의 언론보도 통제 속에 짓눌려 있던 민족혼을 일깨우고 광복에의 희망의 불길을 다시 한번 지피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개인의 꿈과 이상이 바른 역사인식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면 자신이 추구하는 그 꿈과 이상으로 인해 어떤 결과가 닥칠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는 일이다. 나라 잃은 조국의 현실에 분루(憤淚)를 흘리며 후배들에게 물려줄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헌신했던 선배들의 의기와 애국심만은, 그들이 지켜온 나라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 학생들이 잊지 않기 바란다.

안중현 부산지방보훈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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